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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McCARTNEY] 대중음악평론가 임진모가 들려주는 비틀즈 이야기 1편_미국을 정복하다, 세계를 흔들다(1962-1965)

2014.04.15

 

현대카드 슈퍼콘서트 20의 주인공은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로 선정되었다. 전설적인 밴드 비틀즈(The Beatles) 시절부터 그와의 만남을 기대하는 국내 팬들이 많았는데 드디어 2014년, PAUL McCARTNEY 현대카드 슈퍼콘서트 20을 통해 내한 공연을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비틀즈 시절의 다른 멤버들과 함께 하는 공연은 아니지만 다수의 비틀즈 히트곡을 작곡한 폴 매카트니의 공연을 통해서 우리는 비틀즈의 모습을 추억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비틀즈부터 이어져 현재까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그의 음악세계를 확인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PAUL McCARTNEY 현대카드 슈퍼콘서트 20를 통해 마주하게 될 감동에 앞서 두 편의 칼럼을 통해 비틀즈를 다시 한번 되돌아 보고자 한다. 

 

 

 

 

비틀즈는 신비롭다. 세상에 이름이 알려진 지 어느덧 5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어도 그들의 음악은 여전히 글로벌 시장에서 굳건한 위상을 지키면서 과거 아닌현재 시제를 띠고 있다. 그들이 20세기 문화유산으로, 대중음악의 절대 신화로 숭배되는 원동력은 말할 것도 없이 음악의 드높은 예술성에 있다. 리더 격인 폴 매카트니(베이스)와 존 레논(John Lennon, 기타)은 그 예술성을 주조해낸 인물이다. 둘은 비틀즈 음악의 95%를 써내면서 역사상 가장 성공한 작사, 작곡 콤비로 또 음악천재로 남아있다. 팝의 스탠더드가 된 ‘Yesterday’를 위시해 ‘A Day in the Life’, ‘All You Need Is Love’, ‘Hey Jude’, ‘Let It Be’ 등 몇 곡만 들어도 누구든 수긍한다. 대중은 물론 실제로 음악 하는 사람들도 일제히 하늘이 내려준 두 사람의 재기에 찬사를 보낸다.

 

 

누구보다도 고생한 그룹 비틀즈

 

 

초기 비틀즈의 모습 (출처: The Beatles)

 

 

그러나 천재성만으로 비틀즈의 세계를 설명할 수는 없다. 그들은 영국의 런던도 아닌 항구도시 리버풀 출신의 ‘촌놈’들이며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이 전부인 빈곤한 노동계급의 청년들이었다.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 기타)은 비틀즈에 합류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로큰롤 밴드를 하면 정말 많은 돈을 벌게 될 것 같았다. 집과 수영장을 구입하고 아버지를 위해 버스를 사드리려고 했다.” 리버풀의 촌부였던 조지 해리슨의 아버지는 실제로 리버풀 동네를 도는 마을버스 안 승객들을 관리하는 버스 차장으로 생계를 꾸렸다. 가난이 사무친 나머지 나중에 떼돈을 벌어 부친에게 버스를 선물하려 했던 것이다. 그들은 죽어라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었다. 리버풀의 부자 브라이언 앱스타인(Brian Epstein)이 그들의 매니저로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레코드사들은 그들을 쉽게 받아주지 않았다. 오디션에 연이어 떨어졌다. 그럼에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의 목표는 가당찮게도 미국정복이었다.

 

폴 매카트니 존 레논은 10대 때인 1957년에 만났고 존은 이듬해 ‘Hey Little Girl’을 썼으며 1960년에 가장 멋진 밴드 명으로 꼽히는 '비틀즈'라는 이름을 지었다. 하지만 지구촌을 들었다 놨다 한 ‘비틀마니아(Beatlemania)’ 현상이 터지기 전까지 그들은 무명 시기를 겪으며 최소 4~5년 정도 밑바닥 생활을 했다. 존 레논의 회고대로 손이 아프도록 기타를 쳤고 목이 터져라 노래했다. 가장 늦게 합류한 링고 스타(Ringo Starr, 드럼)는 “당시 우리의 에너지는 사자와 코끼리 같았다”고 회고했다.

 

 

캐번 클럽에서 연주하는 비틀즈 (출처: The Beatles)

 

 

무명기에 그들은 리버풀의 지하클럽 캐번(Cavern Club)을 벗어나 오로지 실력을 쌓기 위해 저 멀리 독일 함부르크 클럽을 왕래하며 연주했다. 지구촌 석권을 위한 숨 가쁜 열정이자 가혹한 자기단련훈련이었다. 존 레논의 “나는 리버풀에서 길러졌지만 함부르크에서 성장했다”는 말은 너무도 유명하다. 함부르크에서 숙소를 잡지 못했을 때는 무대 뒤 깡패와 창녀가 우글거리는 허름한 곳에서 잠을 잤다고 한다. 조지 해리슨은 “함부르크 클럽에서 우리는 하루에 2펜스를 받고 8시간을 연주해야 했다. 너무 힘들어서 집에 오면 차라리 매니저 브라이언 앱스타인이 칼을 들고 죽을 때까지 찔러주기를 바랄 정도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들은 그렇게 고된 생활을 하면서도 당시 서구권에서 유행하는 음악을 모조리 섭렵했다. 모르는 게 없었다. 1950년대 블루스와 로커빌리, 모타운 R&B, 틴 팬 앨리 팝, 라틴 음악 등 갖가지 장르의 곡들을 골라 커버 연주했다. 심지어 ‘베사메 무초'와 같은 라틴 팝도 구사했다. 그들은 모든 것을 흡수해 자신들의 독창적 스타일로 빚어내는 스펀지 같은 존재들이었다. 다른 뮤지션의 곡을 부지런히 연주한 끝에 ‘Please Please Me’, ‘A Hard Day’s Night’, ‘I Feel Fine’ 같은 그들만의 곡들이 나온 것이다. 평론가 그렉 쇼(Greg Shaw)는 “비틀즈는 단지 뮤지션이 아니었다. 그들은 최초의 그리고 첫째가는 로큰롤 팬이었다. 그리고 바로 음악에 대한 지식과 헌신이 그들을 특별한 존재로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마침내 미국을 정복하다

 

비틀마니아의 모습 (출처: CBSNEWS, 왼쪽, 오른쪽)

 

 

1964년 2월 7일 영국의 더벅머리 네 남자가 미국 존 F. 케네디 공항(John F. Kennedy International Airport)에 내리는 순간, 세계의 음악역사는 송두리째 바뀌었다. 비틀마니아와 더불어 이제 음악의 중심은 ‘젊은이들’과 ‘대중음악’으로 이동했다. 어른과 고전음악은 뒷전으로 물러나야 했다. 또한 그들의 광풍은 음악계를 벗어나 사회적 현상으로 확대되었다. 1963년 영국을 휩쓴 비틀즈의 인기는 당시 영국 내각을 발칵 뒤집어놓은 성추문, 이른바 ‘프로퓨모(Profum o) 스캔들’ 마저 잠재워버렸다. 미국에 갔을 때는 케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이 사망한지 3개월도 지나지 않아 미국 전체가 실의에 빠져 있었지만 비틀즈를 통해 미국 국민들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활기를 되찾았다.

 

 

 

 

미국 상륙과 더불어 발표한 곡 ‘I Want to Hold Your Hand’는 전미 차트 7주간 정상을 차지했다. 자신들을 로큰롤로 인도한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의 나라’ 미국에 가서 비틀즈의 깃대를 꽂겠다는 야망을 마침내 실현한 순간이었다. 이어진 곡 ‘Can’t Buy Me Love’는 선 주문만으로 170만장이 나가는 판매 신기원을 이룩했다. 이제는 전설의 일화로 회자되곤 하는데 1964년 4월 4일자 빌보드 차트는 1위부터 5위까지가 모두 비틀즈 노래였고, 100위권 안에 그들 노래가 12곡 랭크되었다.

 

비틀즈 초기 음악은 경쾌한 로큰롤이었다. 1950년대 미국 로큰롤에 영국 특유의 셔플 리듬과 보컬 하모니를 덧입힌 스타일로, 강하지만 느낌은 밝았다. 로큰롤의 빠른 속도감과 소녀들의 폭발적 반응을 이끌었던 곡 중간의 함성 ‘예! 예! 예!(yeah yeah yeah)’는 비틀즈를 이른바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 영국인의 침공)’으로 견인했다. 그들이 미국에서 성공하자 영국의 무수한 록 그룹들이 통과의례처럼 대서양을 횡단해 미국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롤링 스톤스(The Rolling Stones), 더 후(The Who), 애니멀스(The Animals), 할리스(The Hollies), 서처스(The Searchers) 등이 그들이었다. 미국은 갑자기 영국 판으로 바뀌었다.

 

 

밴드라는 미학의 확립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틀즈는 밴드라는 형식을 통해 모든 것을 일궈냈다는 사실이다. 밴드란 곡 쓰기, 연주, 편곡 등 음악의 제반 영역을 구성원들이 스스로 해결하는 이른바 자주(自主)의 표현이다. 그들은 이전까지 기성세대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던 청춘이 로큰롤 밴드와 함께 스스로 일어서는 독립과 자가발전의 시대를 이끌었다.

 

지구촌의 젊은이들이 너도나도 그들처럼 기타를 치고 드럼을 울려대기 시작했다. 보릿고개를 벗어나지 못한 가난한 한국에서도 당시 서울 장안에만 한국의 비틀즈를 꿈꾸는 200여 개의 밴드가 우후죽순 생겨났다. 기존 질서에 도전하며 약동했던 1960년대 청년문화 흐름의 정 중앙에 바로 비틀즈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폴 매카트니는 언젠가 “우리는 한 세대의 대변자들이었다(We were just the spokesmen of a generation)”고 일갈한 바 있다. 1960년대는 흔히 서구의 가치를 통째로 바꾼 전환 시대로 규정되곤 한다. 비틀즈의 팬을 자처한 전설적인 뉴욕필하모니의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은 “후대의 누군가가 1960년대를 알려거든 비틀즈 음악을 들어라”고 했다. 비틀즈가 수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숭앙되는 데는 천재적 예술성과 청년정신이 있지만 여기서 하나를 더 추가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시대성’이다.

 

 

어린 시절 한 동네에서 자란 소년들이 모여 밴드를 결성하고 훗날 그들은 세계적인 글로벌 스타가 되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던 초기에는 하루 종일 클럽에서 라이브 연주를 했고 타지 함부르크에서 쫓겨나 고생 끝에 리버풀로 돌아오기도 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하기에는 그들 모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그 재능 못지 않은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이 똑똑한 청년들은 자신들의 음악세계에 '시대'를 반영했고, 한 '시대'를 주도하는 뮤지션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그들의 음악세계는 점점 더 무르익어 팝 뮤직사에 회자되는 명반을 만들어 내게 된다. PAUL McCARTNEY 현대카드 슈퍼콘서트 20을 기대하며 이어지는 칼럼 비틀즈 이야기 2편_명반으로 예술성을 불태우다(1966-1970)에서는 비틀즈 역사 후기의 절정에 이른 그들의 음악 세계와 밴드가 해체되는 과정, 그리고 해체 이후에도 변함없었던 그들의 음악 작업에 대해 소개한다.

 

 

- 서구 대중음악의 여러 분기점을 만든 비틀즈의 역사는 흔히 무명시절, 지구촌 정복, 예술성 구축, 그룹 결속력 약화 등 4분하여 설명하거나 혹은 초기, 중기, 말기 등 3분하여 정리하곤 한다. 그러나 1966년 공연을 중단하고 앨범의 예술성 추구에 집중하기 시작했던 이전과 이후로 크게 2분하기도 한다. 두 시점 간에는 음악의 성격은 물론 팀원들 간의 역학에 있어 두드러진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글은 이 구분을 따라 전반기는 '비틀즈의 글로벌 시장 정복', 후반기는 '비틀즈가 주도한 대중음악의 혁명'으로 구성했다.

 

 


 

Writer. 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로 활동 중이며
현재 MBC FM <배철수의 음악캠프>, Mnet <음담패설> 등 다수 프로그램에 고정출연하고 있고
 웹진 이즘을 운영하고 있다.

 

 

 

[전문가 칼럼] 대중음악평론가 임진모가 들려주는 비틀즈 이야기 2편_명반으로 예술성을 불태우다(1966-19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