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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워치] 탁월한 연극이자 뛰어난 인터뷰, 블랙 워치

2012.10.29

 

현대카드 Culture Project 08 Black Watch가 첫 아시아 공연으로 선택한 현대카드 Culture Project의 8번째 무대 블랙 워치가 수많은 관객들의 호평과 박수 속에 성황리에 막을 내렸습니다. 역시 스코틀랜드 국립극단을 일약 스타덤에 올린 연극답다는 평이 이어졌는데요.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존 티파니의 연출로 현대 연극의 정수를 보여준 블랙 워치. 연극이 아닌 이슈로서 우리 눈 앞에 펼쳐졌던 블랙 워치 무대의 기억을 <씬 플레이빌>의 객원 기자이신 이혜령님의 글로 되새겨봅니다.

 



시작부터 평소와 다르다. 객석 출입구가 아닌 무대 출입구로 입장을 하고, 무대가 있어야 할 자리에 낯선 모양의 객석이 세워져 있다. 어디서 봤던가? 연출가 존 티파니의 말을 듣고서야 기억해 냈다. 8월의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그 축제의 도시에서 밤을 밝혔던 ‘에든버러 밀리터리 타투’의 현장과 닮아 있었다. 이는 에든버러 성문 양쪽에 솟은 언덕 둔치에 객석을 마련하고, 그 사이로 길게 난 광장 위에서 벌어지는 군악대 축제이다. 1950년 시작하여 지금까지 약 50여 개국의 군악대가 참여했고, 평균 공연 인원만 1,000명 가까이 되는 대규모의 축제이다. 같은 기간에 진행되는 다른 공연예술 축제보다 티켓을 구하기가 훨씬 어려울 만큼 인기도 높다. 즐길 것들이 산재해 있는 8월의 에든버러에서 대체 왜 군대의 문화행사가 왜 이렇게 인기가 높은지 의문이 들었었다. 스코틀랜드와 킬트, 백파이프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의 자부심에 대해서 전혀 몰랐기 때문에 가능했던 의문이다. 그리고 이제서야, 연극 <블랙 워치>를 통해 답이 보이는 질문이기도 하다.


 

 

 

 

<블랙 워치>, 그것은 탁월한 연극이고 동시에 좋은 인터뷰였다. 잘 알려진 대로 퇴직 군인들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가 바탕이 되어 작가 그레고리 버크가 대본을 완성하였는데, 이는 극의 형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처음에 등장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고 독백을 하는 남자는 이라크 전에 참전했던 ‘블랙 워치’의 멤버이다. 뒤이어 당구나 치며 노닥거리는 그의 과거 동료들과 인터뷰를 제안했던 기자가 등장한다. 이라크에서 어땠냐고 묻는 기자와 그게 궁금하면 직접 가보라고 응소하는 퇴직 군인들의 대립 구조는 천천히 허물어 진다. 물론 술과 여자에 관한 우스개 소리 때문만은 아니다. 인터뷰어는 전에 듣지 못했던 이야기를 듣게 되고, 인터뷰이는 미처 하지 못했으나 실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기자는 다시 묻는다. 그 때의 이라크가 어땠는지가 아니라, 당신들이 이라크에서 경험한 것들이 어땠는지가 궁금하다고.

 

인터뷰의 주제로는 300년 전통의 스코틀랜드 특수부대 ‘블랙 워치’의 연대원이 미군의 대체 인력으로 이라크 전에 파병되었을 당시 벌어진 사건이 다루어 진다. 적절한 질문과 진솔한 대답을 따라서, 무대는 술집의 당구대와 이라크 도그우드 캠프의 장갑차 사이를 넘나든다. 인터뷰에 응한 젊은이들은 변변찮은 빵집에 취직하는 대신 더 남자답고 멋져 보이는 직업 군인의 길을 택했다. 비록 과거의 영광은 많이 사라졌지만, <블랙 워치>는 그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그 위의 조상이 대대로 용맹하게 싸웠던 자랑스러운 기억이며, 그것을 상징하는 붉은 깃털을 모자에 꽃은 300년 전통의 스코틀랜드 특수부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극이 된 ‘블랙 워치’는 그 부대의 용맹함만 담아 낸 작품이 아니다. 언론의 보도와 전해오는 소문, 편집된 기억을 통해 여과된 고른 말들은 무대 위에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전쟁터의 현장에 남은 두려움과 과장된 활약의 찌꺼기들까지, 전쟁을 경험한 이들의 참상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그들은 전쟁터로 보내졌고,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시덥잖은 게임과 난잡한 농담을 이어가고, 제대 후에 먹고 싶은 인도 요리에 관해 떠들었다. 용맹함을 떨치기에는 훈련이 덜 되었고, 두려움을 갖지 않기에는 폭약 소리가 쉴새 없이 터졌다. 제대를 하고 싶어도 서류가 없어졌다는 정부의 대응에 반강제로 다시 전쟁터로 보내졌다. 강한 척을 하기에도 힘에 부친, 아직은 어린 군인들이었다. 


이들은 참전을 옹호하지도 비난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기억이 자동차 자폭 테러사건이 벌어졌던 때로 거슬러 가며, 긴장은 고조된다. 복잡한 정치적 사회적 맥락 사이에서 투입된 명분 없는 전쟁, 그 사이에 터진 자동차 폭탄 테러는 순식간에 상황을 전복시킨다. 이 사고로 세 명의 부대원과 한 명의 통역원이 목숨을 잃었다. 여느 전쟁에서나 일어나는 폭격과 테러, 사고와 사망, 부상.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동원되었던 회피와 과장된 자부심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그들은 동료를 잃었고, 스스로 부상을 입었다.

 

인터뷰.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개인이나 집단이 만나 정보를 수집하고 또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두고 인터뷰라고 칭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문답의 형식을 취하는데, 주로 직접 대면하여 진행되지만 때에 따라 서면으로 대체하기도 한다. 연극 <블랙 워치>에서는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그 인터뷰의 내용과 과정을 가능한 고스란히 무대 위에 올렸다. 대사 자체에 에든버러의 강한 억양과 전쟁터에 보내진 군인들의 욕설이나 화법이 드러나고, 스코틀랜드의 사회적 맥락이 엮여 있다. 대사에 대한 이해도가 작품을 이해하는데 미치는 영향력과 거의 같은 선상에 있을 경우, 자칫 다른 문화권이나 비영어권 국가에서는 관객이 극을 받아들이기에 어려움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번역된 텍스트와 무대를 오가는 시선 사이에, 이런 우려를 불식시키는 뛰어난 연출이 있었다. 화려한 무대 장치나 대형 세트, 특별한 소품들은 도입되지 않았다. 불필요한 것은 최대한 배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대는 꽉 찼고, 지루할 틈이 없었다. 아마도 이것이 존 티파니라는 연출가가 찬사를 받는 이유일 것이다.

 

 

 

 

별다른 오브제도 없고 화려한 기교의 안무도 없다. 노래를 부르지만 뛰어난 가창력을 뽐내는 것도 아니다. 대신 블랙 워치 부대원들의 행진이나 훈련의 일상적인 움직임에 약간의 양식화를 가미하여 반복된다. 반복되는 동작 패턴은 시각적으로, 또 의미적으로 모두 뛰어난 효과를 냈다. 청각적인 요소들의 점층적 고조는 반복의 미학을 극대화했다. 음악과 대원들의 고함소리, 함성이 함께 고조되는 과정은 밀도감 높은 긴장감을 완성했다. 특히 자동차 자폭 테러 사건에서 팔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던 대원의 진술 장면과 뒤이어 재현되는 테러 사건 현장 장면은 이와 같은 특성이 가장 잘 드러나 있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정예부대 ‘블랙 워치’와 그들의 사기를 충만하게 하던 백파이프와 드럼 소리, 그리고 자부심으로 넘치는 밀리터리 타투까지. 이들의 관계가 이제서야 이해되었다. 하나 더 분명한 것은 이들의 자부심이 영웅과 영광만을 추대하며 인간적인 상실감을 남기는 전쟁을 더 이상 긍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스코틀랜드 국립극단이 만든 연극 <블랙 워치>가 그 증거이다.

 

 

 

 

당구대만한 사이즈의 장갑차에서 덜컹거리며 실없는 수다를 떨던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장갑차만한 사이즈의 당구대에서 시간을 보내며, 그 때에 대한 기억을 어렵사리 털어놓았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어쩌면 독특한 극의 구조나 연출에서 드러난 실험적인 연극적 특성이 다가 아니었다. 이는 고전을 무대에 올리고 재해석하며 연극을 위한 연극을 하는 것이 아니다. 대신 바로 현재를 이야기하고, 동시대의 민감한 문제를 다루는 의식 있는 노력으로 작품을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다. 2011년 12월 5일, 그제서야 지지부진 이어지던 전쟁이 공식적으로 끝났다. 회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또 쉽지 않다. 그러나 꺼리는 이야기를 꺼내놓은 ‘블랙 워치’ 부대원들과 그 인터뷰를 다시 무대로 올려 놓은 <블랙 워치>는 억지로 영광을 포장하거나 억지부리지 않는다. 다행히 진솔한 인터뷰와 뛰어난 무대가 만나 연극 <블랙 워치>가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치유가 시작될 것이다.

 

 


 

Writer 이혜령(@iamflowering)

 

예술파티 프로듀서이자 뮤지컬 제작사 팀장이었고 현재는 서울대 공연예술학협동과정 학생 신분으로

씬플레이빌 공연잡지 객원기자와 하이서울페스티벌 해외팀에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