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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스칼 전] 음악과 사랑 그리고 그림이 만들어 낸 앙상블, 영화 <치코와 리타>

2013.11.27

 

두 예술가의 극적인 만남, 하비에르 마리스칼과 페르난도 트루에바

 

가끔 서로 다른 영역에서 일하는 사람이 만나 새로운 예술적 화염을 불태우는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초현실주의 작가 살바도르 달리와 스릴러의 거장 알프레드 히치콕의 만남 같은 것 말이다. 알프레드 히치콕은 잉그리드 버그먼과 그레고리 펙 주연의 스릴러 <스펠바운드>(1945)를 만들면서 살바도르 달리를 불러들였다. “꿈이 나오는 장면을 시각적으로 선명하고 뚜렷하게, 영화 그 자체보다도 더 명료한 이미지로 얻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스펠바운드>는 히치콕의 가장 위대한 걸작은 아니다. 하지만 달리가 참여한 매혹적인 꿈 장면들을 보고 있노라면, 전혀 다른 예술가들의 만남이 성취한 예술적 흥취에 절로 감탄사를 내뱉게 된다.

 

 

 

<스펠바운드>

 

 

스페인의 그래픽 디자이너 하비에르 마리스칼과 영화감독 페르난도 트루에바의 만남도 달리와 히치콕의 만남에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페르난도 트루에바는 프랑코라는 독재자의 휘하에서 고단하게 살아갔던 스페인 현대사 속 사람들을 블랙 코미디적인 터치로 스크린에 그려온 감독이다. 그는 1992년작 <아름다운 시절>로 오스카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한 직후 할리우드로 건너가 안토니오 반데라스, 멜라니 그리피스 주연의 로맨틱 코미디 <투 머치>(1995)를 찍기도 했다. 문제는 거기서 시작됐다. 이 영화의 할리우드 흥행이 실패로 돌아가며 그의 경력에 흠집이 생기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하비에르 마리스칼과의 만남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두 사람이 함께 만든 애니메이션 <치코와 리타> 덕분이다.

 

 

 

Calle 54 Poster

 

 

<치코와 리타>를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두 사람의 만남을 추적해 보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한동안 라틴 음악에 빠져 살았던 페르난도 트루에바는 2000년도에 <칼레 54>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티토 푸엔테스, 베보 발데스 등 라틴 재즈 역사에 길이 남을 연주자들이 카메라 앞에서 음악으로 역사를 증언하는 작품이었다. 트루에바는 당대 최고의 스페인 그래픽 디자이너인 마리스칼에게 포스터 작업을 부탁했고, 흔쾌히 작업에 뛰어든 마리스칼 덕택에 영화 포스터 역사에 남을 만한 훌륭한 작품이 탄생했다.

 

 

BLANCO Y NEGRO Poster

 

Calle 54

 

 

둘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트루에바는 <칼레 54>에 등장한 쿠바 뮤지션 베보 발데스의 콘서트를 담은 <브란코 이 네그로>(2003)를 만들었고, 이 작품의 포스터 역시 마리스칼이 근사하게 창조해 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리스칼이 포스터 작업을 위해 그려 놓은 쿠바 스케치들을 본 트루에바 감독에게 뭔가 영감이 떠올랐다. 그 근사한 그림들에 라틴 음악을 입혀서 애니메이션으로 만드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었다. 결국 페르난도 트루에바가 연출과 각본을 맡고, 하비에르 마리스칼이 작화를 맡는 공정으로 두 사람은 <치코와 리타>를 만들었다.

 

 


Chico & Rita

 

 

아름다운 음악과 매력적인 캐릭터, 독창적인 그림의 조화가 돋보이는 작품 <치코와 리타>

 

<치코와 리타>는 1948년 쿠바의 하바나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다. 야망으로 가득한 피아니스트 치코는 클럽 가수 리타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젊은 날 불타던 사랑은 욕망과 질투와 오해로 무너지게 마련이다. 헤어진 두 사람은 각기 뉴욕에서 활동을 시작하지만, 시대의 격랑 속에서 그들은 서로에 대한 그리움을 버리지 못한다. 어떻게 보면 <치코와 리타>는 정말 통속적인 사랑 이야기다. 바람둥이 남자와 재능 있는 여자가 사랑과 헤어짐을 거듭한 다음, 결국 서로가 인생의 동반자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이야기는 인류 역사상 매우 자주 반복되어 온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코와 리타>가 진부해 보이지 않는 것은 페르난도 트루에바와 하비에르 마리스칼이라는 두 예술가가 창조한 미학적 성취 덕분이다.

 

 

Chico & Rita

 

 

<치코와 리타>는 CG 애니메이션에 익숙한 세대에게는 다소 구시대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전통적인 셀 애니메이션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다른 애니메이션들이 보여주지 못하는 묘한 예술적 흥취가 가득한데, 그것은 오히려 페르난도 트루에바와 하비에르 마리스칼이 예전에 애니메이션을 한번도 만들어보지 않은 초보자들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원래 이 영화를 실제 촬영 분 위에 애니메이션을 덧입히는 ‘로코스토핑’ 방식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로코스토핑 특유의 지나칠 정도로 자연스러운 움직임이 자신들의 미감에 딱 들어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배우들의 움직임을 고스란히 촬영한 다음 그것을 토대로 애니메이션화했다. 이 방식의 장점은 하비에르 마리스칼이 캐리커처로 그려낸 작화의 그래픽적인 아름다움을 제대로 살려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페르난도 트루에바는 자신의 예술적 동반자인 하비에르 마리스칼의 그림을 가장 아름답게 스크린에 옮길 수 있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Chico & Rita

 

Chico & Rita

 

 

사실 페르난도 트루에바와 하비에르 마리스칼의 아름다운 동업에 대해 이야기하느라 놓친, 또 한 명의 동반자가 있다. 바로 1940~50년대 쿠바에서 전성기를 보낸, 그리고 이후 재발견된 뮤지션 베보 발데스다. <치코와 리타>는 베보 발데스의 삶과 음악으로부터 받은 영감이 아니었다면 만들어 질 수 없었던 영화다. 특히 1940~50년대 쿠바 하바나에서 모히토를 마시며 인생을 자축하던 라틴 음악가들, 그들 사이에서 리타가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베사메 무초’를 부르는 장면의 아름다움을 한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이 장면의 아름다움은 페르난도 트루에바, 하비에르 마리스칼, 그리고 베보 발데스라는 세 나이 든 예술가들의 극적인 협연의 결과라고 부를 만 하다. 영화 속에서 리타는 이렇게 노래한다. “미래 같은 건 의미가 없어요. 내가 바라는 건 모두 과거에 있으니까요”. 하비에르 마리스칼과 페르난도 트루에바는 오로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과거의 흔적으로부터 미래에도 지속될 아름다움을 발견해 냈다.

 

 


 

Writer. 김도훈

 

월간지 ‘GEEK’ 피쳐 디렉터.

‘씨네21’에서 오랫동안 영화 기사를 써왔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들에 대해 거침없이 쓰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