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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McCARTNEY] 대중의 품으로, 폴 매카트니 VS 예술의 품으로, 존 레논

2014.05.12

 

현대카드 슈퍼콘서트 20의 주인공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와 존 레논(John Lennon). 대중 음악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밴드로 꼽히는 비틀즈(The Beatles)는 이 둘의 만남으로 시작했지만 또한 이 두 사람 때문에 위대한 발걸음을 마감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함께 품었던 음악에 대한 애정은 서로에 대한 애증으로 변질되어 갔고, 둘은 한동안 극복하기 힘든 관계로 악화됐다. 비틀즈 시절, 두 위대한 아티스트의 음악적 갈등은 거대한 시너지 효과를 내며 순기능을 발휘했지만 비틀즈 해체 이후의 솔로활동은 미움과 질투를 불러일으키며 둘 사이를 갈라놓았다. 이 불편한 상황은 존 레논이 1980년 12월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이 칼럼에서는 비틀즈를 대표하는 두 아티스트 폴 매카트니와 존 레논의 행보를 비교해 살펴봄으로써 그들의 달랐던 삶과 가치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평탄했던 폴 매카트니 VS 불우했던 존 레논

  

비틀즈 초기시절 폴 매카트니, 존 레논 (출처: The Beatles, 왼쪽, 오른쪽)

 

 

어쩌면 폴 매카트니와 존 레논은 물과 기름처럼 처음부터 어울릴 수 없는 사이였을지도 모른다. 음악에 대한 열정과 비슷한 시기에 어머니를 잃었다는 공통점을 빼면 둘의 합일점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간호사인 어머니와 1920년대에 재즈 밴드에서 트럼펫과 피아노를 연주한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폴 매카트니는 유복하진 않았지만 비교적 평탄한 가정환경에서 성장했다. 폴 매카트니는 부모님으로부터 트럼펫이나 손목시계를 생일선물로 받는 등 사랑과 관심을 받으며 자랐고 영리해서 명문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영문학을 좋아했던 폴은 글짓기 대회에서 특별상을 받을 정도로 작문실력이 뛰어났지만 그의 관심사는 음악이었다. 아버지에게 피아노를 가르쳐달라고 졸랐지만 아버지는 잘 치는 사람에게 정식으로 배워야 한다고 타일렀고, 폴 매카트니는 정식 음악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 지금도 악보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곡을 만든다. 그가 수많은 명곡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우선 마음과 귀로 음악을 대하라는 아버지의 진실한 가르침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존 레논은 태어날 때부터 축복받지 못했다. 뱃사람이었던 아버지는 존 레논이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집을 떠났다. 그리고 존이 4살 때 부모님은 이혼했다. 혼자서 양육을 감당하기 힘들었던 어머니 줄리아(Julia Lennon)는 존 레논을 언니에게 맡겼다. “서양 사람들 중에서 90%는 술 때문에 태어난다. 아이를 가지려는 의도 없이 우리들 중 90%가 태어난 것이다. 나는 아이를 가지려고 계획했던 사람을 한 명도 알지 못한다”는 존 레논의 언급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서 한 말이다. 비교적 평탄한 유년시절을 보낸 폴 매카트니의 성격은 유순했지만 남자가 없는 가정에서 성장한 존 레논은 일부러 거칠고 강하게 보이기 위해서 까칠하고 반항기 넘치는 소년처럼 행동했다. 당시 존 레논의 유일한 관심거리는 오직 미술과 로큰롤이었다. 그는 부모에게 버림 받았다는 상처를 훗날 ‘Mother’라는 곡을 통해 솔직히 표현했다.

 

‘아버지는 나를 떠났지만 나는 아버지를 떠나지 않았어요 / 어머니는 저를 가졌지만 저는 어머니를 갖지 못했어요 / 어머니 가지 마세요 / 아버지 돌아오세요 (Father, you left me, but I never left you / Mother, you had me, but I never had you / Mama don't go / Daddy come home)’

 

폴 매카트니와 존 레논은 모두 10대 중반이었을 때, 어머니를 잃는 동병상련을 겪는다. 아버지가 없는 존 레논이 받은 충격은 컸다. 훗날 그 상처를 극복하고 치유하기 위해 ‘Julia’와 ‘My Mummy's Dead’라는 곡을 발표했고 폴 매카트니도 ‘Let It Be’에서 어머니 메리(Mary Patricia McCARTNEY)를 등장시킨다. 어머니의 죽음은 폴 매카트니와 존 레논이 공감대를 형성하며 그룹의 결속력을 강하게 다지는 밑거름이 됐다. 비틀즈의 마지막까지 두 사람이 작곡한 노래는이 작곡했든 존이 작곡했든 모든 곡을 ‘레논-매카트니(Lennon-McCARTNEY) 혹은 매카트니-레논(McCARTNEY-Lennon)’로 표기하기로 한 것도 바로 이때의 도원결의 때문이었다.

 

 

‘Silly Love Songs’ VS ‘Power to the People’

 

윙스 'Silly Love Songs' 싱글앨범, 존 레논 'Power to the People' 싱글앨범 (출처: Wikipedia, 왼쪽, 오른쪽)

 

 

폴 매카트니와 존 레논의 긴장관계는 서로에게 자극을 주며 수많은 명곡을 배출하는 자양분이었다. 하지만 1967년에 비틀즈의 매니저 브라이언 앱스타인(Brian Epstein)이 사망하면서 그룹은 혼돈의 블랙홀에 빠졌다. 폴 매카트니와 존 레논의 아슬아슬한 경쟁을 명석하게 조율했던 브라이언 앱스타인이 사망하자 그룹의 헤게모니는 폴 매카트니 쪽으로 서서히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팀을 구성한 존 레논으로선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고, 설상가상으로 1970년 4월에 폴 매카트니가 존 레논과 상의도 없이 단독으로 비틀즈의 해산을 발표함으로써 둘의 사이는 더욱 악화됐다. 그리고 그 이후 비틀즈를 떠난 두 사람의 길은 많이 달랐다.

 

              

 

 

비틀즈를 떠난 폴 매카트니는 존 레논과 달리 음악에 전념하며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었다. 폴 매카트니는 대저택에서 스튜디오를 만들어 놓고 음악에 몰두했다. 1973년에는 당대 최고의 가수만이 부를 수 있다는 영화 '007'의 주제곡 ‘Live and Let Die’를 불러 여전한 인기를 확인했고, 비틀즈의 ‘Blackbird’를 떠올리는 ‘Bluebird’를 발표하면서 여전히 ‘비틀’로 기억되길 희망했다. 존 레논을 포함해 많은 비평가들이 폴 매카트니가 사랑 노래만 부른다고 비판하자, 항의 표시로 1976년에 5주 동안 빌보드 정상을 지킨 ‘Silly Love Songs’를 발표했다.

 

‘한심한 사랑 노래는 지겹게 들었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런 것 같지 않아요 / 한심한 사랑 노래로 세상을 채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거든요 / 그래서 뭐가 잘못된 거죠? (You'd think that people would've had enough of silly love songs But I look around me and I see it isn't so / Some people want to fill the world with silly love songs / And what's wrong with that?)’

 

 

 

 

존 레논은 7살 연상인 전위 예술가 오노 요코(小野 洋子)를 만나면서 시야를 넓혀 음악을 넘어 세상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음악에도 자신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기 시작했다. 히피의 모태인 비트족 리더였던 알란 긴스버그(Allen Ginsberg)와 하버드대 교수 티모시 리어리(Timothy Leary) 등 급진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들과 어울리며 투사로서의 활동도 활발히 했다. 가장 위대한 반전 노래 중 하나로 꼽히는 ‘Give Peace a Chance’와 ‘권력을 지금 당장 국민에게 주자’는 ‘Power to the People’ 그리고 자본주의와 민족주의를 부정하는 반(反)기독교적인 노래 ‘Imagine’은 그의 사상을 대표하는 곡들이다. 심지어 ‘God’에서는 신도 믿지 않고, 자신의 우상이었던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를 포함해서 자신의 모태인 비틀즈까지도 거부하며 오직 자신과 아내 오노 요코만을 믿는다고 노래했다. 그는 비틀즈의 멤버로 옛 영광을 투영하지 않고 거리로 나와 사람들과 함께 구호를 외쳤다. ‘비틀’ 존 레논이 아니라 ‘투사’ 존 레논으로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이렇듯 ‘Silly Love Songs’와 ‘Power to the People’은 폴 매카트니와 존 레논의 상반된 시각과 태도를 상징하는 대표곡으로 폴 매카트니가 세상의 밝은 면을 노래했다면 존 레논은 사회의 어두운 면을 들춰냈다. 이것은 폴 매카트니와 존 레논의 성향을 가늠할 수 있는 바로미터일 것이다. 둘의 갈등은 음악 밖에서도 불거졌다. 폴 매카트니는 1971년에 발표한 두 번째 앨범 [Ram]의 앨범커버에서 양의 뿔을 쥐고 있는데 그건 바로 고집불통 존 레논을 양에 빗대 표현한 것이었다. 발끈한 존 레논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앨범 [Imagine]의 속지에 돼지 귀를 잡고 있는 사진을 넣어 응대했고 ‘How Do You Sleep?’이란 곡에서는 폴 매카트니가 만든 ‘Yesterday’와 ‘Another Day’를 직접 언급하면서 냉소적으로 표현했다.

 

 

음악적 동료 린다 맥카트니 VS 예술적 동지 오노 요코

 

폴 매카트니와 린다 매카트니, 존 레논과 오노 요코 (출처: PAUL McCARTNEY, WIKIMEDIA COMMONS)

 

 

의 아내 린다 매카트니(Linda McCARTNEY)는 1960년대 후반에 주로 가수들의 인물사진을 찍는 사진작가였고 존의 아내 오노 요코는 아방가르드 아티스트였다. 린다는 과 함께 그룹 윙스(Wings)의 멤버로 활동하며 늘 과 함께 하는 잉꼬부부로 유명했지만 요코와 존은 1970년대 중반에 잠시 별거했다가 재결합하는 등 불같은 사랑을 했다. 일본의 대기업 야수다 그룹 설립자인 야수다 젠지로(安田 善次郞)의 증손녀인 오노 요코는 존 레논과 함께 음악과 정신을 공유하는 예술의 동반자가 되어 존이 더 넓은 세상으로 뻗어나갈 수 있도록 힘을 주었다. 그래서 존 레논은 자신과 오노 요코의 관계는 선생님과 학생의 관계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우연인지 린다 매카트니와 오노 요코는 둘 다 아티스트였고, 과 존보다 연상이며 영국인이 아니라는 교집합이 있다(린다 매카트니는 유대계 미국인이다). 과 린다가 1969년 3월 12일에 비밀 결혼식을 올렸고 존과 요코 역시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8일 후인 1969년 3월 20일에 비공개 결혼식을 했다. 

 

린다 매카트니는 1998년 세상을 떠났고 존 레논은 1980년에 사망했다. 비틀즈 해체시기에 그룹활동에 깊게 관여하던 오노 요코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던 폴 매카트니는 1994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당식에서 오노 요코를 만나 오래된 앙금을 풀고 감동적인 화해를 했다.  

 

 

증오와 질투를 이긴 우정과 음악

 

폴 매카트니와 존 레논은 한동안 라이벌로서 서로 질투와 미움의 대상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비틀즈라는 전설적인 밴드의 멤버이자 위대한 아티스트다. 그들의 우정은 훌륭한 음악으로 표현됐고, 미움은 지독한 경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폴 매카트니는 2013년에 발표한 신곡 ‘Early Days’에 대해 “그 곡을 만들던 날, 어린 시절 리버풀에서 존 레논과 함께했던 시간을 추억하고 있었다. 함께 음반가게에서 로큰롤 음악을 들으면서 벽에 붙은 포스터를 보는 장면을 떠올렸다. 옛일을 회상하는 건 내게 큰 기쁨이다”라고 말했다. 이제 고희를 넘긴 폴 매카트니의 인자한 웃음에는 넉넉한 어르신의 자비로움이 스며들어있고 존 레논과의 껄끄러웠던 관계를 회복한 평온함도 번져있다. 지금 존 레논이 살아있다면 서로에게 미안하다 말하며 진하게 끌어안을 것이다. 세월의 흐름은 인간의 분노와 증오, 미움을 희석시키고 그것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만들어준다.

 

 

폴 매카트니가 존 레논을 추억하는 것처럼 전세계 수많은 팬들이 존 레논을 추억하고 그리워한다. 그리고 세기의 라이벌이었던 폴 매카트니를 통해 존 레논을 떠올리기도 한다. 현대카드 슈퍼콘서트 20를 통해 처음으로 내한하는 폴 매카트니의 공연에서 우리는 그의 영원한 음악적 라이벌이자 동지인 존 레논의 모습도 함께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Writer. 소승근
MBC 라디오 '성시경의 푸른 밤', '주영훈의 두 시의 데이트'
CBS 라디오 ‘한동준의 FM POPS’ 작가로 활동했으며
웹진 이즘의 필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