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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우 화이트] 사랑, 폭력과 관능 사이 - 프렐조카쥬의 <스노우 화이트>와 <로미오와 줄리엣>

2014.10.24


폭력을 시적으로 그려내는 탐미주의자, 앙쥴렝 프렐조카쥬(이하 프렐조카쥬)의 무대는 금방이라도 뇌관이 터질 듯한 긴장된 에너지로 가득하고 무대 위를 유영하는 무용수들의 몸짓은 관능적이면서도 우수에 차 있다. 세계 유수의 발레단들이 파격, 도발, 전위 등의 수식어가 항상 따라다니는 그와 함께 작업하기를 원한다. 프렐조카쥬는 전 세계에서 가장 바쁜 안무가이자 가장 왕성하게 작품을 만드는 안무가 중 한 사람이다.

 

안타깝게도 국내 관객들에게는 프렐조카쥬의 작품을 실제 무대에서 볼 기회가 많지 않았는데, 지난 2012년 볼쇼이발레단과 협력프로젝트였던 <그리고, 천년의 평화(And Then, One Thousand Years of Peace)> 이후 그의 다른 작품을 기다려온 관객들에게 반가운 뉴스가 전해졌다. 프렐조카쥬 발레단이 현대카드 컬처프로젝트 16 Snow White로 내한한다는 것이다. 현대카드는 16번째 컬처프로젝트로 앞서 선보여왔던 전시나 연극이 아닌 무용공연을 선택했다.



 



프렐조카쥬의 새로운 백설공주
 

백설공주 이야기는 전 세계를 통틀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지만 프렐조카쥬가 우리가 알고 있는 동화 내용 그대로 사냥꾼에게, 난쟁이들에게, 또 왕자님에게 목숨을 구원받는 가련하고 아름다운 백설공주를 그대로 무대로 데려갈 리는 없으니 그렇다면 어떤 백설공주인가 하는 작품에 대한 관심도 몹시 뜨겁다.

 


 


 

프렐조카쥬가 그 동안 천착해온 인간 내면의 폭력성이라는 주제는 <스노우 화이트>에서도 여전하다. 그러나 폭력을 통해 원하는 것을 얻고자(혹은 원치 않는 것을 제거하고자) 하는 계모와는 달리 백설공주는 자연 그대로의 건강한 생명력을 가진 순수한 존재다. 작품 초반에 공주의 생모인 왕비는 상복 같은 검은 드레스를 입은 채 만삭의 몸으로 등장해 백설공주를 낳고 곧 죽음을 맞는다. 왕비의 검은 의상과 대조적으로 눈송이가 어깨에 내려와 앉은 듯한 백설공주의 흰색 의상은 옆부분이 트여 있어 관능적인 느낌을 주는 한편 아기를 감싼 기저귀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돈나의 코르셋브라를 디자인한 것으로도 유명한 고티에의 위트는 <스노우 화이트>의 의상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 Jean-Pierre Maurin 출처: www.idocpreljocaj.org



프렐조카쥬는 백설공주를 디즈니 애니메이션 속의 수동적인 캐릭터가 아니라 진정한 사랑을 아는 성숙한 여성으로 그리고 있는데, 백설공주는 계모에 의해 왕궁에서 쫓겨난 뒤 숲으로 가서 맑은 공기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맛보고 이웃나라 왕자에게서 태초의 감정인 사랑에 눈을 뜬다. 연인이 된 두 사람이 키스하고 서로를 만지고 희롱하며 즐거워하는 모습은 마치 어린 아이가 새로운 놀잇감을 발견했을 때처럼 무구함 그 자체다. 백설공주를 감싸고 있는 숲의 세계를 위협하는 것은 계모의 악의다. 계모에게 발각되기 전까지 백설공주는 안전하고 행복하다.

 


어둡고 그로테스크한 로미오와 줄리엣 


프렐조카쥬는 90년작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낭만적이고 격정적인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비틀어 미래적인 설정을 통해 통제된 세계의 폭력성을 꼬집었다.

 


ⓒ Jean-Pierre Maurin 출처: www.idocpreljocaj.org



<로미오와 줄리엣>의 두 주인공은 구원(舊怨)이 얽힌 베로나의 두 귀족가문이 아니라 노동자 측인 몬태규 가문과 사용자 측을 대변하는 캐플릿 가문 출신으로, 개인보다 강한 계급의 지배를 받는 경직된 세계에 속해 있다. 공장의 현장감독 같은 인상을 주는 티볼트는 가문의 여자를 통제하는 아랍의 가부장들을 떠올리게 하는 고압적인 인물로 재해석되고, 줄리엣의 유모가 변형된 두 개인비서는 원작의 희극성이 거세된 채 줄리엣을 감시하는 역할에 충실한 로봇 같은 존재들이다.



ⓒ Jean-Pierre Maurin 출처: www.idocpreljocaj.org



그래서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은 사랑 그대로의 사랑이라기보다 내일도 출구도 없는 절박한 인간이 잠시의 몸부림으로 현재를 거부하는 절망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죽음으로 현재를 벗어난 뒤 등장하는 티볼트의 냉엄한 시선은 원작에서 둘의 죽음이 적대하는 가문을 화해시키는 단초가 되는 것과 달리 이 세계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죽음으로도 바뀌는 것 없이 계속 이 상태가 유지되리라는 절망을 한 겹 더 얹어줄 따름이다.

 

 

잔혹동화, 그러나 해피엔딩
 


 

계모가 먹음직스러운 빨간 사과로 백설공주를 유혹하는 장면에서 도드라지는 것은 프렐조카쥬의 장기인 난폭한 에로티시즘이다. 계모는 살의로 눈을 빛내며 백설공주의 입에 사과를 밀어 넣은 채 그녀를 거칠게 빙빙 돌리는데, 이 장면은 94년작 <공원(Le Parc)>의 3막에서 여자 무용수가 남자 무용수에게 두 팔의 힘으로만 매달린 채 회전하며 긴 입맞춤을 나누는 장면과 닮아 있다. 백설공주를 죽이려는 계모와 저항하는 백설공주, 그리고 영원히 입술을 맞댄 채 피안으로 떠날 것 같은 연인들, 전혀 다른 상황이지만 난폭함 속에 관능이 번뜩이는 무대의 분위기는 매우 흡사하다.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서로를 떠받치는 형국이다. 


 

ⓒ Agathe Poupeney / Opéra national de Paris


 

로미오와 줄리엣은 죽었지만 백설공주는 계모가 주는 독사과를 먹고도 죽지 않는다. 그녀를 죽음으로부터 되살려낸 것은 왕자의 간곡한 부름, 진심을 다한 간절한 사랑이었다. 마침내 숨이 돌아와 눈을 뜬 백설공주는 성으로 가서 결혼식을 올린다. 프렐조카쥬는 그림형제의 원작에서처럼 백설공주의 결혼식에서 불에 달군 구두를 신고 춤을 추는 형벌을 받는 계모의 모습으로 대단원을 장식하며 사랑을 불신하거나 회피하는 성인들을 위한 현대의 동화를 완성했다. 동화를 믿는 쪽이든 그렇지 않은 쪽이든, 이제 당신 차례다.







Writer. 윤단우
글 쓰는 사람. 다른 말로는 작가. 요즘은 기자. <사랑을 읽다>, <결혼 파업, 30대 여자들이 결혼하지 않는 이유> 저자.

최근에는 댄서가 반짝이는 무대와 무용 전문지<몸>의 편집실을 오가느라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