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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우 화이트] 죽음을 이겨낸 숭고한 사랑, 그리고 구원 – 컬처프로젝트 16 Snow White

2014.11.19


디즈니의 사랑스러운 애니메이션을 떠올리며 극장을 찾았다면 예상 외로 잔혹한 장면들로 채워진 무대를 보고 당혹감을 느꼈을지도, 안무가의 이름과 전작들에 대한 기대가 앞섰다면 생각보다 얌전한 작품의 수위에 대해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현대카드가 16번째 컬처프로젝트로 국내 관객들 앞에 선보인 앙쥴렝 프렐조카쥬(이하 프렐조카쥬)의 <Snow White(스노우 화이트)> 이야기다.


 

 



프렐조카쥬는 우리가 권선징악의 전래동화로 기억하는 백설공주 이야기를 죽음을 이겨낸 숭고한 사랑이야기로 해석했다. 그는 그림형제의 원작을 바탕으로 안무하되 스토리텔링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백설공주와 왕자의 사랑을 작품의 중심에 놓았다. 


동화에서는 백설공주의 생모가 공주를 낳다 죽었다고 간단히 언급될 뿐이지만 프렐조카쥬는 작품의 도입부에서 만삭의 왕비를 등장시켜 그가 진통의 고통 속에 죽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죽음 속에서 태어난 백설공주의 존재를 뚜렷이 각인시킨다. 이 장면은 뒷부분에 가서 독이 든 사과를 먹고 백설공주가 왕자의 키스로 죽음에서 되돌아오는 장면과 좋은 대구를 이룬다. 


그러나 첫 번째 죽음에서 백설공주의 아버지인 왕이 아내의 죽음을 막지 못하고 대신 어린 딸을 받아 안아야 했던 반면 두 번째 죽음에서 이웃나라 왕자는 죽은 백설공주를 간절한 부름으로 되살려낸다. 아내를 잃은 왕은 곧 아름다운 새 아내를 맞아들이지만 왕자는 되살아난 백설공주와 결혼식을 올린다. 두 개의 죽음은 닮은 듯하지만 죽음을 둘러싼 사랑은 이처럼 다르다. 

 


동화 속 가장 아름다운 악녀


백설공주와 대립각을 세우는 인물인 계모는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설공주가 밝음이라면 계모는 어둠을 의미하며, 모두가 사랑하는 백설공주와는 반대로 계모는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피하려 한다. 무도회가 한창인 백설공주의 성인식에 <잠자는 숲숙의 미녀>의 카라보스를 떠올리게 하는 불청객처럼 계모가 등장한다. 





분노를 쏟아내며 무도회를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계모는 사람들을 자기 뜻대로 두려움에 떨게 하는 위협적인 인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죽은 왕비의 그림자와 다 자란 공주의 존재에 가려진 채 인정욕구에 시달리는 연약한 인물이기도, 또 늙음을 두려워하며 사랑을 갈구하는 한 여성이기도 하다. 


이러한 프렐조카쥬의 계모는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가 안무한 <신데렐라>의 계모나 <로미오와 줄리엣>의 캐플릿 부인과도 닮아 있다. 그들과의 차이는 백설공주의 계모는 자신의 지위(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라는)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방해가 되는 존재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거할 수 있는 힘과 악의를 가졌다는 점이다.


이번 공연에서 계모 역으로 데뷔한 레아 드 나탈은 다리를 힘차게 위로 뻗는 동작구가 많은 안무를 시원시원한 발놀림으로 소화해내며 계모의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내면을 인상적으로 표현했다. 왕비다운 위엄을 잃지 않으면서도 교태가 느껴지는 몸짓으로 계모의 여성성을 다시금 환기시키고, 작품의 대단원인 백설공주의 결혼식에서 죄에 대한 대가로 불에 달궈진 쇠구두를 신고 춤을 추는 장면에서도 역동적인 몸짓으로 무대를 장악했다. 


작품에서 백설공주가 되살아나는 장면 못지않게 중요한 장면인 계모가 공주에게 독사과를 먹이는 장면은 죽이려는 계모와 죽지 않기 위해 저항하는 백설공주가 대립하며 에너지가 절정에 이르는 부분이다. 독이 든 사과는 계모의 살의를 상징하는 한편 그 먹음직스러움으로 공주를 유혹하는 성적 에너지로도 충만해 프렐조카쥬의 장기인 ‘난폭한 관능’을 유감 없이 보여주는 매개체다. 



죽음을 극복한 사랑


<스노우 화이트>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왕자의 존재다. 동화 원작에서 왕자는 마지막 순간에 나타나 백설공주를 구원하는 도구적인 역할에 머물러 있지만 프렐조카쥬의 왕자는 죽은 육신에 숨을 불어넣어주는 생명 그 자체이며, 백설공주 역시 동화 속 수동적인 주인공이 아니라 왕자에게 먼저 키스하는 도발적이고 적극적인 여성이다. 


왕자는 성인식 도중에 궁에서 쫓겨난 백설공주를 숲까지 따라가고, 둘은 계모의 위협이 없는 숲에서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연인이 된다. 서로를 만지고 희롱하며 즐거워하는 백설공주와 왕자의 모습은 어린 아이들처럼 천진난만하다. 낙원의 아담과 이브처럼 무구하던 둘의 사랑은 백설공주의 죽음을 계기로 구원에 이르는 깊고 숭고한 것으로 변화한다. 그동안 숱한 작품에서 죽음을 다양하게 변주해온 프렐조카쥬는 <스노우 화이트>에서 죽음을 통해 캐릭터의 성장과 사랑의 성숙을 동시에 이뤄냈다. 왕자가 잠든(혹은 죽은) 공주를 키스로 깨운다는 점에서 <스노우 화이트>의 키스는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그것과 흡사해 보이지만 프렐조카쥬는 이 키스를 죽음을 극복한 사랑의 승리로 승화시키고 있다.





랄랑드는 순수한 백설공주일 때는 가벼운 몸놀림과 춤이 아닌 듯한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여주는 한편 죽은 다음 왕자와 2인무를 추는 장면에서는 무동(無動), 즉 움직이지 않은 채 무게중심을 이동시켜 죽은 육신을 표현하며 왕자 역의 장샤를르 주스니와 빈틈없는 호흡을 빚어냈다. 

 


구스타프 말러와 장 폴 고티에의 만남


안무 외에 재기 넘치는 아이디어 역시 돋보였다. 광산에서 일하는 일곱 난장이들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무용수들이 줄을 타고 내려오며 만들어내는 아크로바틱한 움직임도 장관이었지만 그 장면에 사용된 음악이 말러의 교향곡 1번 ‘거인’이라는 점도 프렐조카쥬의 재치에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성년이 된 백설공주가 선물로 받은 붉은색 스카프나, 백설공주의 관으로 설정된 투명한 아크릴판 같은 암시로 가득한 소품들도 인상적이었다. 특유의 위트와 에로티시즘으로 무장한 장 폴 고티에의 의상 덕분에 인물 개개인의 캐릭터가 더욱 분명해졌고, 신중하게 선택된 말러의 음악들은 작품을 한층 풍성하고 입체감 있게 만들어주었다. 





컬처프로젝트 16 Snow White는 무용팬은 물론 말러의 선율이 무용과 만나면 어떤 결과물이 만들어지는지, 또 무용수들이 짖궂은 고티에의 의상을 입고 어떻게 춤을 추는지 궁금했던 사람들에게도 눈과 귀가 즐거운 자리가 되었을 것이다. 모쪼록 프렐조카쥬가 그의 희망사항처럼 다음번에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가지고 한국을 곧 다시 방문해주기를 기대한다.





Writer. 윤단우
글 쓰는 사람. 쓴 책으로는 <사랑을 읽다>, <결혼파업, 30대 여자들이 결혼하지 않는 이유> 등이 있고

무용전문지 <몸>에서 무용 관련 취재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