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글 보기

[스노우 화이트] 여성의 섹슈얼리티로 재해석된 ‘백설공주’ 앙쥴렝 프렐조카쥬의 <Snow White>

2014.11.21


착한 백설공주와 나쁜 계모 왕비의 그 유명한 권선징악 스토리가 두 여성 간의 섹슈얼리티 문제로 흥미롭게 다시 태어났다. 앙쥴렝 프렐조카쥬(이하 프렐조카쥬)는 상반되는 이미지의 의상과 다른 장르의 춤 동작으로 공주와 왕비의 캐릭터를 대비시켜 <Snow White(스노우 화이트)>의 두 축으로 삼는다. 이런 시도를 통해 백설공주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사춘기 소녀로, 계모 왕비는 아름다움에 관한 강박증에 걸린 성인 여성으로 탈바꿈된다. 패션 디자이너 장 폴 고티에가 디자인한 인상적인 의상들은 이 같은 새로운 해석에 효과적으로 힘을 보탠다.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뒤집는 과감한 상상력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동화의 원작들은 사실 선정적이고 잔혹한 설정을 지닌 것들이 많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어린이 버전으로 오랫동안 알려진 ‘백설공주’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프렐조카쥬는 바로 이 이야기의 어두운 진실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디즈니 버전 대신 그림 형제의 원작을 바탕으로, 장기인 관능적 안무와 연출을 가미해 자신만의 색깔을 덧입혔다. 이런 과정을 거쳐 오랜 시간 동안 익숙해졌던 ‘백설공주’ 이야기는 한층 새롭고 강렬하게 탈바꿈했다.





이 작업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기존 캐릭터를 재해석하는 일이다. <스노우 화이트>는 초반부부터 백설공주와 계모 왕비의 기존 이미지를 해체하는 비주얼로 이 극이 ‘새로운 이야기’임을 선언한다. 클래식 발레나 네오클래식 발레의 동화적 튀튀(클래식 발레리나 스커트) 대신 옆 라인을 과감하게 드러낸 의상을 입은 백설공주는 순진한 소녀의 모습보다는 여성으로서의 욕망이 시작되는 과도기적 숙녀로 그려진다. 반면 왕비는 진한 메이크업과 가터벨트 차림, 성숙한 여인의 굴곡을 드러낸 아슬아슬한 옷차림으로 백설공주와 상반된 매력을 보여준다. 애니메이션 속 패션을 재현한 듯한 왕비의 비주얼은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이처럼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인물 설정은 기존의 권선징악적 서사 대신 사춘기 소녀와 성인 여성의 욕망과 섹슈얼리티 문제로 이야기의 틀을 자연스럽게 재배치한다.


기존 서사의 ‘낯설게 하기’에 성공한 <스노우 화이트>는 이런 강력한 해석의 힘을 원동력으로 새로운 메시지나 춤의 영역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간다. 그 중에서도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계모 왕비의 존재감이다. 공주를 질투하는 못된 계모 정도로 단순화됐던 기존 설정과 달리 <스노우 화이트>의 왕비는 거울 앞에서 떠날 줄 모르는 나르시스적 여성상을 보여준다. 그런 자기애적 판타지가 무너졌을 때, 왕비는 주변을 휘젓는 과격한 발차기 동작을 통해 그 자괴감을 그려낸다. 백설공주가 섬세한 발레 테크닉으로 로맨틱한 여성상을 보여준다면, 왕비는 거친 현대무용으로 히스테리컬한 여성의 단면을 표현한다. 특유의 장신구와 의상들을 하나둘씩 벗어 던지면서 노파로 변하는 장면에서는 흡사 <지킬 앤 하이드>의 대표적인 변신 장면을 떠올리게 하며 진한 인상을 남긴다.



프렐조카쥬가 창조한 ‘컨템포러리 백설공주’




프렐조카쥬의 안무적 특징은 감각적이고 세련된 에로티시즘에 있다. 그의 전작들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안무에는 무용수 사이의 절묘한 접촉과 박력 넘치는 신체의 전시가 들어가 있다. 이런 특징은 <스노우 화이트>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클래식 발레가 주를 이루는 국내에서 모던 발레 또는 컨템포러리 발레는 그 추상적 움직임 때문에 관객들에게 대체로 난해하게 수용되곤 한다. 이는 온갖 종류의 철학적 주제로 점철된 현대무용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런데 <스노우 화이트>에서의 발레 신들은 충분히 ‘현대적’이면서도 어렵지 않게 다가온다. 가령 백설공주와 왕자의 2인무는 정적 속에서 무반주로 시작함에도 관객의 시선을 확 잡아끈다. 이런 몰입이 가능한 것은 프렐조카쥬의 섬세한 에로티시즘이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보여주는 로맨틱한 디테일들은 프렐조카쥬의 특징을 오롯이 담아낸다. 왕자가 반대쪽으로 쓰려지려는 백설공주의 발목을 잡아 절묘하게 균형을 유지하는 순간이나, 머리로 백설공주의 배를 부드럽게 밀쳐내는 장난스러운 동작들은 그야말로 연인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은밀한 ‘연결성’을 담고 있다.


이런 연결성은 후반부에서 또 한 번 인상적으로 반복된다. 왕자가 죽은 백설공주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추는 2인무가 그것이다. 가사상태를 연기하는 백설공주와 그녀를 끌어안고 추는 왕자의 춤은 고난도의 테크닉과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명장면이다. 의식을 잃은 공주의 몸이 중력과 왕자의 동작에 따라 이리저리 휩쓸리는 아슬아슬한 순간, 관객들의 몰입감은 어느 때보다 높았다. 왕자의 키스로 인해 백설공주가 부활한다는 원작의 설정보다, 격렬한 춤을 통해 되살아난다는 <스노우 화이트>의 해석은 훨씬 낭만적이면서 공감을 자아낼 만하다.



기괴하면서도 매력적인 판타지


기본적으로 원작의 정서를 따라가는 까닭에 이 작품의 무대는 시종일관 어둡다. 이는 처음부터 이 이야기가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동화가 아니라는 것을 반증한다. 결국 계모 왕비는 원작처럼 불에 달군 쇠구두를 신고 죽을 때까지 몸부림치며 죽음을 맞는다. 이런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스노우 화이트>는 ‘스노우 화이트’ 옷을 입은 백설공주의 등장에 흰 조명을 비춘다. 이는 극 전반을 지배하는 계모 왕비의 강렬한 비주얼과 균형을 맞추려는 연출과 조명의 예술적 감각이 빛나는 부분이다.





원작에는 몇 가지 초현실적인 설정이 등장하는데, 그 중 하나가 ‘마법의 거울’이다. <스노우 화이트>에서도 왕비의 애장품인 마법의 거울은 그녀의 일그러진 내면과 추악한 욕망을 드러내는 효과적인 도구가 된다. 거대한 액자형 거울 앞에 선 왕비와 거울에 비친 왕비의 모습이 함께 보여주는 대칭적 움직임은 인물의 나르시스적 면모를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또 거친 질감의 절벽 사이에서 나타난 난쟁이들, 몸에 와이어를 끼우고 공중에서 등장해 백설공주를 들어올리는 친모 왕비의 영혼은 발레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연출로 눈길을 끌었다. 


의상과 음악은 처음부터 프렐조카쥬의 안무와 함께 이 파격적인 해석의 핵심적 요소였다. 패션 디자이너 장 폴 고티에의 의상은 작품 전반에 걸쳐 강한 인상을 남겼다. 특히 계모 왕비와 백설공주에 대한 ‘선택’과 ‘집중’은 <스노우 화이트>가 기존 이야기의 전형을 극복할 수 있게 한 일등공신이 됐다. 구스타프 말러가 작곡한 웅장한 교향곡의 선율은 로맨틱하면서도 동화적인 원작의 본질을 연결해주며 작품에 안정감을 주는 데 기여했다. 


컨템포러리 아트에서 ‘파격’은 이제 일상적인 것이 됐다. 하지만 원작의 내용과 형식을 극단적으로 바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만드는 시도는 종종 ‘파격’보다 ‘파괴’라는 결과를 초래하곤 한다. 때문에 진정한 파격은 비슷한 내용과 형식을 미묘하게 비틀어 전혀 다른 정서와 메시지를 도출할 때 가능하다. <스노우 화이트>의 파격이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로 이런 까닭에서다.





Writer. 송준호
컬처 칼럼니스트. [더 뮤지컬] 부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