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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YBREAK] 이기 팝을 둘러싼 중독들

2013.07.17

 

이기 팝과 그의 밴드 더 스투지스는 그야말로 기행의 아이콘이다. 누구보다도 빨랐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과격했다. 술이든 약이든 언제나 흥건하게 취해 무대를 가로질렀고, 무대가 좁다고 느낀 순간 청중의 숲으로 파고들었다. 더럽거나 위험한 짓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래서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열광하는 사람도 있었다. 시간이 흘러 그와 그의 밴드를 다시 관찰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관찰해보니 이기 팝과 그의 밴드는 늘 무언가에 중독되어 있었고, 그들은 어느 순간 세상에 새로운 중독을 안겨주었다. 이기 앤 더 스투지스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그들이 탐닉했던 대상과 그들에 대한 세상의 탐닉을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되는 그들의 기나긴 역사다. Timeless Legend, 폴 매카트니를 말하다

 

 

 

 

 

이기는 피넛 버터를 좋아해

 

1970년 6월 13일, 신시내티 팝 페스티벌 현장의 일부가 TV 중계로 나갔다. 그리고 모두가 경악할 만한 순간이 전파를 탔다. 어느 밴드가 나왔는데, 일단 음악부터가 괴상망측했다. 정돈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사운드 요소들을 그저 엉망진창으로 나열한 상태에 가까웠다. 그럴 만도 했다. 등장한 밴드는 신예 더 스투지스였고, 그들이 발표한 첫 앨범 “The Stooges”(1969)의 수록곡 절반 이상이 첫 번째 합주를 앞둔 전날 밤에 쓰였다. 그 놀라운 작업 속도는 전설로 남았고 작품이 간직한 원시성은 유의미한 평론의 대상이 됐지만 그건 다 나중에 재평가된 일이다. 1970년의 미국은 이런 미친 음악에 너그럽지 못했다. 노래를 소화하는 인간은 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 인간의 이름은 이기 팝이었는데, 노래라고 말할 수 없는 괴성만 시종일관 질러대고 있었다. 그러다 스테이지 다이빙에 돌입했다. 청중에 파묻혀 노래하던 그는 돌연 수많은 청중의 손을 발판 삼아 솟아올랐다. 그러더니 갑자기 피넛 버터를 가슴에 바르기 시작했다. 위험하기 짝없는 데다 위생 개념까지 상실한 충격의 무대가 미국 전역에 생중계된 것이다.

 

드러머로 밴드 생활을 시작한 청년 제임스 뉴웰 오스터버그 주니어(James Newell Osterberg, Jr)는 활동을 지속하면서 이기 팝이라는 닉네임을 얻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청년은 1967년 미시건 대학에서 열린 도어즈의 역동적인 공연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긴 후, 새로운 밴드 더 스투지스를 결성하고 도어즈가 하던 짓을 극단적으로 따라 하기 시작한다. 스테이지 다이빙까지는 그냥 도어즈도 하고 다른 밴드들도 하고 그의 밴드 더 스투지스도 하는 작은 이벤트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 그는 갑자기 식빵 혹은 햄버거에 빙의해 가슴팍에 피넛 버터를 발랐고, 그러다 토마토케첩 같은 소스가 필요하다고 느꼈는지 깨진 유리를 몸에 박았다. 당시 밴드에 대한 반응은 극과 극으로 갈렸다. 이 광기가 새롭다고 느낀 측과 역겹다고 흥분하는 측이 대립했다. 이기 팝과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일부는 열광했기에 현장에 찾아가 스테이지로 파고든 보컬리스트 이기 팝을 번쩍 들어 올렸고 버터와 피로 얼룩진 더럽고 끔찍한 공연을 즐겼다. 하지만 대다수가 혐오했기에 채널을 돌리거나 방송국과 프로그램 제작진에게 거센 항의 전화를 돌렸다.

 

 

더 스투지스는 약물을 좋아해

 

밴드의 역사는 짧았다. 2000년대에 접어들어 재결성을 이루긴 했지만 1967년 출발해 세 장의 앨범을 발표한 후 1974년 활동을 접었다. 지속되지 못한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헤로인을 비롯한 각종 약물과 지나친 음주에 있다. 이기 팝의 정신 나간 퍼포먼스 또한 같은 이유에서 비롯된다. 이기 팝만 그랬던 게 아니다. 1970년 8월 더 스투지스의 드러머 데이브 알렉산더가 방출된다. 공연을 망쳤기 때문이다. 중요한 페스티벌을 앞두고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술을 많이 마신 탓이다. 게다가 결말도 좋지 않다. 그로부터 5년이 흐른 뒤 27세의 데이브 알렉산더는 폐부종으로 눈을 감았다. 역시나 과한 음주가 사망의 원인이 되었다.

 

데이브 알렉산더의 탈퇴 이후 밴드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새 멤버를 받아들이고 나아가 충원까지 했다. 거기에 더해 데이비드 보위를 만나 영국 진출을 이루면서 전과 다른 완성도를 얻었다. 하지만 음악은 발전했을지언정 밴드 생활 구석구석에 깃든 약물 문제를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들의 약물 복용은 결성 당시 매니저였던 존 아담스의 소개로 시작됐다. 그러다 리드 기타리스트 론 애쉬튼만 빼놓고 모두가 중독자가 됐다. 집단적으로 늘 이렇게 취해 있으니 공연은커녕 리허설조차 할 수 없는 형편이 되자 소속사 내부에서 공연 일정을 취소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약물로 인한 돌발행동이 결국 밴드의 미래를 막았다. 동료 데이비드 보위가 아무리 나서서 치료를 권하고 돕는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기 팝의 경우 몇 년을 그렇게 살다가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자발적인 각성이 찾아왔다. 1980년대 초반에는 완전히 끊고 가정을 이루면서 전보다는 건강해진 인생을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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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이기를 좋아해

 

약물에 젖어 활동하던 당시 더 스투지스의 지지자는 공연장에 드나드는 열성팬을 제외하고 찾기 어려웠다. 평가도 시원찮았다. ‘쇼크 록(shock rock)’이라 불릴 만큼 음악은 물론 공연 매너와 라이프 스타일까지 모든 것이 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결국 1970년대 중반부터 런던과 뉴욕을 중심으로 똬리를 틀기 시작한 펑크의 원형이 되었다. 물론 더 스투지스의 음악을 펑크라고만 단정할 수는 없다. 사이키델릭, 블루스, 로큰롤까지 다양한 록의 요소들이 결합된 복합적인 사운드이지만, 결과적으로 펑크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음악이라는 얘기다. 그들의 여파는 일단 대도시의 음습한 공연장에서 출발했다. 그들보다는 간단한 리프의 음악으로, 그리고 그들만큼 죽기살기로 무대를 누비는 젊은 피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펑크의 개념이 정립되기 전에 발표된 그들의 세 번째 앨범 “Raw Power”(1973)는 펑크의 원형으로 후에 평가되기 시작했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그들에게 영향을 받았거나 그들에 대한 애정을 고백하는 이들이 속속 나타났다. 우선 펑크의 애티튜드는 더 스투지스에게 대대적인 빚을 지고 있다. 영국 대표 펑크 아티스트 섹스 피스톨즈의 루키 시절은 ‘No Fun’과 ‘I Wanna Be Your Dog’ 등 더 스투지스의 노래를 커버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은 “Raw Power”을 인생의 넘버원 앨범으로 꼽았다. 레이지 어게인스트 머신과 REM 등도 더 스투지스의 노래를 커버하는 것으로 경의를 표했다. 2010년 이기 앤 더 스투지스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고, 펑크의 까마득한 후예 그린데이의 빌리 조 암스트롱이 헌정자로 선정됐다. 한때 더 스투지스는 외면과 불편의 아이콘과 같았다. 그건 시대를 앞서나갔다는 반증이다. 하지만 결국 게임은 그들의 승리로 끝났다. 합당한 평가가 이루어지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을 만큼 진보적인 음악이었다는 것이 세상의 합의 이자 결론이었다.

 

 

이기는 커피와 담배를 좋아해

 

뮤지션과 논평가들만 이기 팝을 좋아했던 게 아니다. 영화계도 그를 사랑했다. 작업 짬짬이 이기 팝이 출연했던 영화는 대략 20편이다. 재미를 주는 조연으로만 출연한 게 필모그래피의 전부가 아니다. 생생한 그의 캐릭터를 반영해 실존 인물로, 그것도 커피와 담배에 중독된 인물로, 그리고 동료 가수 톰 웨이츠와 인지도를 두고 신경전을 벌이는 인물로 등장한 짐 자무쉬 감독의 <커피와 담배>(2003)는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그의 대표작이다.

 

출연하지 않았지만 출연한 것 같은 효과를 주는 영화도 있었다. 스코틀랜드 정키를 소재로 한 대니 보일의 영화 <트레인스포팅>(1997)는 이기 팝이 솔로 시절에 발표한 ‘Lust For Life’로 시작한다. 누구보다도 유장한 정키의 세월을 보냈던 그의 캐릭터와 딱 맞아떨어지는 선곡이다. 1970년대 초반 글램록의 영화로운 시기를 탐사하는 토드 헤인즈의 <벨벳 골드마인>(1999)은 직접 거론하진 않지만 누가 봐도 데이비드 보위와 이기 팝을 모델로 한 작품이다. 마지막으로 재미있는 일화가 또 있다. 피터 잭슨의 3부작 <반지의 제왕>(2002-2003)에서도 우리는 이기 팝의 그림자를 만날 수 있다. 제작진이 이기 팝을 떠올리지 않았다면 영화의 핵심 캐릭터, 골룸은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늘 웃옷을 시원하게 벗고 갈비뼈와 주름진 피부를 드러내면서 공연에 임하는 광기의 이기 팝 덕분에 골룸은 생명을 얻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