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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라이브러리] 독특한 게임의 즐거움, 한글 서체디자인

2014.12.18


한국을 대표하는 타이포그래피 디자이너 6인의 대표작 소개에 이어 이번에는 한글 서체디자인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

지난 "Talk 04. Typography Design with Paola Anotonelli"에 참석하기도 했던 타이포그래피 저술가 겸 디자이너 유지원님의 글을 통해 한글 폰트 디자이너들만이 누리는 독특한 게임의 즐거움을 만나보세요.




모아쓰기 모듈: 한글 디자인의 독특한 게임. Module for Syllable Based Wiriting
도판1.이미지

도판1.

    1. 1.1 산돌고딕네오1, 디자인: 권경석, 이도경
    2. 1.2 산돌고딕네오3, 디자인: 권경석, 이도경
    1. 1.3 안상수체, 디자인: 안상수
    2. 1.4 윤디자인연구소 율려체, 디자인: 임진욱
    1. 1.5 미르체, 디자인: 안상수
    2. 1.6 산돌상하이체, 디자인: 이호, 곽두열



한글 폰트를 디자인할 때는, 한자나 라틴알파벳 등 다른 글자시스템을 디자인할 때와는 다른 독특한 한 판 게임을 벌여야 합니다. 한글은 모아쓰기를 하는 글자시스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한글만의 유일한 특성까지는 아니더라도 매우 보기 드문 특성입니다.


위 도판1.에서 맨 앞 글자인 ‘한’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자음인 ‘ㅎ(h)’, 모음인 ‘ㅏ(a)’, 그리고 다시 자음인 ‘ㄴ(n)’, 즉 세 개의 음소가 결합해서 ‘한(han)’이라는 사각형 음절을 이룹니다. 그것도 라틴알파벳처럼 한 방향의 선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로와 세로 두 방향으로 결합해서 2차원 사각형을 구축합니다.


위 도판1.에 예를 든 여섯 종류의 한글 폰트들은 모두 부리가 없는 고딕 계열입니다. 구조의 차이를 선명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다른 변수들을 가급적 통제하려 일부러 고딕 계열의 폰트들만 골랐습니다. 음소들의 형태는 서로 비슷하더라도, 구조가 어떻게 달라지느냐에 따라 폰트의 얼굴표정이 확연하게 바뀝니다. 이 구조를 모듈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한글 폰트 디자인에서는 모듈을 설계하는 것이 유독 중요합니다.

  • 도판2. 이미지

    한글 금속활자

  • 한글 금속활자는 도판2.에서 보다시피, 글자 하나가 음소 단위 아닌 사각형 음절 단위로 이루어졌습니다.

    영어와 대부분 유럽 언어를 표기하는 라틴 알파벳은 소리글자이고 음소글자입니다. 그런 한편, 중국어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여러 언어를 표기하는 한자는 글자 하나가 하나의 뜻을 가진 단어로 기능하는  뜻글자이고 단어글자입니다.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이라는 환경 속에서, 한글은 중국어와는 구조가 다른 한국어 표기에 꼭 맞는 글자시스템으로서 15세기 뛰어난 언어학자이기도 했던 세종대왕에 의해 발명되었습니다.
  • 도판3.이미지

    한자-한글-라틴 알파벳, 한자, 한글의 사각형 구성과 라틴 알파벳의 선형 진행

  • 그 결과, 한글은 독특하게도 한자의 특성과 라틴 알파벳의 특성을 모두 가지게 되었습니다. 모아쓰기를 하기 때문입니다. 한글의 음절은 한자처럼 사각형의 틀을 가집니다. 이 틀을 세 개의 음소로 나눈 것은 세종대왕의 가장 독보적인 해결책 중 하나였습니다. 세종대왕은 하나의 음절을 초성, 중성, 종성으로 나누었습니다. 중성은 모음이고, 초성과 종성은 둘 다 자음이지만 초성은 위에 종성은 아래에 놓이므로 위치가 다릅니다.

    세종대왕은 초성, 중성, 종성은 '성(聲)', 이들이 결합한 음절은 '음(音)'이라 불렀습니다. '성'은 소리입니다. 한글은 기본적으로 라틴 알파벳과 같은 소리글자이면서 음소글자입니다. 초성만으로 이루어진 ㅋㄹㄹㄹㄹ처럼, '성'은  짐승도 낼 수 있는 자연만물의 소리입니다. 한편, 초성, 중성, 종성이 반듯하게 사각형 틀로 결합한 '음'이야말로 인간이 낼 법한, 의미를 가진 소리라고 여겼습니다. 한국어의 '음'은 대개 단어나 형태소(의미를 가진 최소 단위)로 기능합니다. 그러므로 음절로 모아써야만 한 눈에 의미가 파악됩니다. 즉, 음절로 모아쓰기를 함으로써, 한글은 뜻글자이자 단어글자인 한자와도 특성을 공유하게 됩니다.

    한글의 글자수는 라틴 알파벳보다 두 개 적은 24개에 불과합니다. 기본 자음과 모음이 24개라는 뜻입니다. 초성자음과 중성모음, 혹은 초성자음과 중성모음과 종성자음이 결합해서 사각형의 음절을 이룹니다. 이 음절들은 획 수와 관계없이 똑같은 크기의 사각형을 차지합니다. 그러므로 한글 폰트를 디자인할 때는 각 음절 사각형 내의 공간 배분을 일일이 섬세하게 해주는 노고가 들어갑니다. 이 모든 사각형 음절의 수는 KS 코드 기준 2,350자, 유니코드 기준 11,172자입니다.
  • 도판4. 이미지

    공간 분배가 잘 된 한글 폰트(왼쪽)와 공간 분배가 소홀한 한글 폰트(오른쪽)



도판4. 왼쪽은 글자의 공간 분배를 잘 신경 쓴 폰트 중 하나입니다. ‘늑’과 ‘늘’에서 종성 ‘ㄱ’은 종성 ‘ㄹ’보다 획수가 적습니다. 그러므로 중성 ‘ㅡ’를 기준으로 ‘늑’은 ‘늘’보다 아랫부분의 공간을 덜 차지하므로, 중성의 위치는 ‘늑’이 ‘늘’보다 낮게 잡힙니다. 한글 디자인에서는 적게는 2,350자, 많게는 11,172자 모두 섬세하게 이런 공간 조율을 해주어야 합니다. 오른쪽 폰트처럼 급히 만들어져서 공간 조율이 소홀히 되면, 그 아랫부분 텍스트처럼 조판했을 때 획이 많은 부분이 뭉쳐 서 고르게 보이지 않고 읽기도 불편해집니다. 라틴 알파벳 디자인의 예와 굳이 비교를 하자면, 커닝을 하지 않았을 때 나타나는 현상과 비슷합니다.

  • 도판5. 이미지

    한글 풀어쓰기



위 도판5.의 예처럼 음소들을 모두 풀어쓰자는 시도도 역사에 있었지만, 사각형 덩어리 하나로 한 눈에 의미를 파악하는 본연의 속성에 어긋나 널리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습니다.

  • 도판6.이미지. 공병우 한글 타자기
  • 도판7. 이미지. 안상수체의 세벌식 모듈


한 방향 선형으로 진행하는 라틴 알파벳과는 달리, 한글은 사각형을 만들며 진행합니다. 사각형은 x축과 y축 2차원의 두 방향을 가집니다. 바로 이 점에서 한글 디자인은 디자이너에게도 엔지니어에게도 수고스럽고 까다롭습니다. 그러던 중, 한글의 음소들이 음절로부터 뛰쳐나오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으니, 바로 한글 타자기가 등장하며 한글이 기계화하는 때였습니다. 금속활자는 사각형 음절을 단위로 했지만, 타자기의 자판과 글쇠는 음소를 단위로 하게 됩니다. 음절을 초성, 중성, 종성으로 나누는 한글의 원리에 가장 과학적으로 부합하는 타자기는 자판과 글쇠가 초성, 중성, 종성으로 배열된 공병우 세벌식 타자기였습니다.

  • 도판8.이미지

    완성형, 네모틀, 두벌식

  • 도판8. 아래쪽의 안상수체는 세벌식 한글 글자체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위쪽은 사각형의 음절로 완성된 글자를 일일이 모두 만든다는 의미에서 완성형, 네모틀, 두벌식이라 부르고, 아래쪽은 67개의 음소만 디자인한 후 초성, 중성, 종성의 위치를 모듈로 정한 후 결합시킨다는 의미에서 조합형, 탈네모, 세벌식이라 부릅니다.

    초성과 종성의 ㅇ을 비교해보면, 위쪽 완성형 글자에서는 네모 안에 꽉 차게 공간이 배분되느라 음절에 맞추어 가로로 길어지기도 하고 세로로 길어지기도 합니다. 같은 ㅇ이라도 모양, 크기, 위치가 모두 다릅니다. 아래쪽 조합형 세벌식 글자에서는 초성 자리와 종성 자리끼리 ㅇ의 모양, 크기, 위치가 모두 같습니다. 음소 하나가 모든 음절에 똑같이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종성이 있는 음절은 종성이 없는 음절보다 자연스럽게 길쭉해집니다. 그래서 이런 유형을 탈네모 글자라 부르기도 합니다. 마치 라틴 알파벳 대문자로부터 디센더만 있는 소문자가 생겨난 것 같은 모습입니다.
  • 도판9.이미지

    탈네모형 한글 흘림 글씨체

  • 도판9. 탈네모형 한글 글자체는 한글 기계화 이전, 한글 타자기가 발명되어 세벌식 글자체가 나타나기 전에도 물론 있긴 했습니다. 18-19세기에 빠르게 쓴 한글 흘림체를 보면, 손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따라 ‘월’, ‘졀’처럼 획수가 많은 글자는 큰 공간을 차지하며 길쭉해지고, ‘니’, ‘이’처럼 획수가 적은 글자는 작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 도판10. 이미지

    다양한 모아쓰기 모듈



사각형 모듈을 가진 맨 위 유형의 글자체가 한국에서는 여전히 가장 많이 쓰입니다. 읽기 편하고 격식을 잘 갖추고 있습니다. 두 번째 글자는 약간 탈네모 형태이지만 세벌식은 아닙니다. 세벌식이 급진적인 탈네모 형태라면, 이 완성형 글자는 온건한 탈네모 형태입니다. 읽기 편하면서도 조금은 더 자유롭고 명랑한 표정을 갖고 있어 어린이 책에 많이 쓰입니다.


세 번째 글자는 전형적인 세벌식 탈네모 글자입니다. 위의 두 종류 글자들처럼 읽기 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음소의 형태가 음절로부터 어느 정도 독립해서 자유를 구가하도록 하는 새로운 개념을 한글 디자인에 도입함으로써, 한층 폭넓은 표현의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우리는 읽기 편한 글자만큼 보기 즐거운 글자도 필요로 하고, 가독성, 경제성, 효율성은 중요하지만 이들만이 글자 디자인을 판가름하는 모든 가치는 아닙니다.


네 번째 글자는 중심이 가운데 중성에 맞춰져 있습니다. 마치 중성이 중력의 중심처럼 작용하며, 위아래 초성과 종성을 방사형으로 일정한 거리를 두며 끌어당기는 것 같은 모습입니다.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폰트들은 세벌식에서 한층 더 나아가, 음소들이 파격적인 자유를 구가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세벌식 글자에서 초성, 중성, 종성의 절대적인 위치값이 정해져 있었다면, 여기서는 관성을 벗어나는 위치를 가지면서 서로 간의 상대적 관계의 거리값이 정해집니다. 맨 아래의 디지털 폰트가 가장 파격적입니다. 기계 시대 세벌식 글자들이 오늘날 디지털 시대에 남겨준 진정한 유산은 관습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도전, 에너지 넘치는 풍부한 표현력일 것입니다.


음소들은 사각형 틀의 동아시아적 편안함 속에 안온하게 머무르며 조화를 꾀하기도 하고, 음절 속에서의 결속력을 잃지 않으면서도 혈기왕성하게 뛰쳐나와서 자유를 구가하기도 합니다. 음소와 음절 간의 역학관계를 끝없이 재정의해나가는 것, 여기에 한글 폰트 디자이너들만이 누리는 까다롭지만 독특한 게임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한국 타이포그래피의 독특한 특색을 자세히 소개한 이번 글은 2015년 1월 뉴욕현대미술관(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MoMA) 블로그 “MoMA INSIDE/OUT”에도 포스팅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