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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 큐브릭 전] 현대카드 컬처프로젝트 19 스탠리 큐브릭 전, 이동진의 영화해설 ‘샤이닝’

2016.02.23


찬 바람이 매서웠던 1월의 토요일 저녁, 한산한 거리와는 달리 CGV 아트하우스 압구정은 스탠리 큐브릭 상영회를 앞두고 관객으로 붐비는 모습입니다. 이날의 상영작은 공포영화의 걸작으로 불리는 ‘샤이닝’(Shining). ‘이런 장르를 관람하기엔 다소 스산한 계절이지만 스탠리 큐브릭의 명성답게 표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는 후문입니다. 특히 이날은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해설과 함께 스탠리 큐브릭 필모그래피의 한 자락을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현대카드 컬처프로젝트 19 스탠리 큐브릭 전 이동진의 영화해설 ‘샤이닝’ 현장스케치 이미지



스탠리 큐브릭이 만든 단 하나의 공포영화


겨울이면 눈으로 고립되어 폐쇄되는 ‘오버룩 호텔’. 영화는 집필 작업에 집중하기 위해 관리자로 오게 된 잭(잭 니콜슨 역)과 그의 가족이 대자연의 산길을 굽이굽이 지나 이동하는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광활한 자연과 대비되는 작은 자동차 한 대의 이동을 쫓는 ‘버드 아이 뷰’ 촬영기법과 점점 날카로워지는 배경음악을 통해 세 가족에게 무언가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을 직감할 수 있습니다.


혼령과 환각으로 미쳐가는 잭, 그리고 시공간을 초월하며 교감하는 ‘샤이닝’ 능력을 가진 아들 대니가 인디언들의 묘지 위에 세워진 호텔 내 과거 살인 사건과 연결고리를 맺으며 숨 막히는 전개를 이어갑니다. 화들짝 놀라게 하는 억지스러운 설정 없이도 공포감을 주는 기법상의 세련됨과 단순한 플롯 속에 숨겨진 수많은 의미는 과연 스탠리 큐브릭 표 공포영화답다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샤이닝’ 들여다보기


“세상에 나온 지 26년이나 된 영화라는 게 믿어지나요?” 상영이 끝나자마자 무대에 올라 마이크를 잡은 이동진 영화평론가는 ‘샤이닝’에 대해 ‘호러영화 역사상 랜드마크로 꼽을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라는 말로 해설을 시작했습니다.



 

현대카드 컬처프로젝트 19 스탠리 큐브릭 전 이동진의 영화해설 ‘샤이닝’ 현장스케치 이미지



- 영화를 이해하는 유용한 방법, 전작(前作)을 찾아라

 

이동진 평론가는 어떤 감독의 영화 한 편을 이해하는 가장 쉬운 방법으로 전작을 살펴보라고 말합니다. ‘샤이닝’의 이전 작품은 당시 십 수년간 쌓아온 스탠리 큐브릭의 영광을 좌절하게 만들었던 ‘베리 린든’(Barry Lyndon). 높은 완성도에 비해 그 평가는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이후 ‘베리 린든’과는 전혀 다른 영화를 만들기 위한 큐브릭의 노력이 ‘샤이닝’에 고스란히 담기게 됩니다. 스탠리 큐브릭은 원작에 감명을 받아 공포영화를 찍게 된 것이 아니라, 장르부터 호러로 결정한 뒤 공포소설들을 탐독해나갔다고 합니다. 스티븐 킹의 ‘샤이닝’은 큐브릭이 작업실에 틀어박혀 읽은 수많은 책 중 가장 ‘꽂히게 된’ 스토리였죠.

 

- 걸작에도 임기응변과 우연의 요소는 있다

 

흔히 고전이나 걸작의 가치는 유독 과대평가되고 고정불변의 의도와 의미를 부여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의외로 임기응변과 우연의 산물이 많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완벽주의자 스탠리 큐브릭의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죠. ‘샤이닝’ 하면 떠오르는 대표 장면, 잭이 도끼로 문을 부수며 섬뜩한 킬러 스마일을 짓고 “Here's Johnny”라는 대사를 하는 씬은 숱한 패러디를 탄생시켰는데요. 이 대사 또한 미국 유명 토크쇼 ‘자니 카슨 쇼’의 오프닝 멘트를 차용한 잭 니콜슨의 애드립이었다고 합니다. 예술이 모두 의도와 계획에 근거한다면 그거야말로 조악한 결과물이 아닐까요?



현대카드 컬처프로젝트 19 스탠리 큐브릭 전 이동진의 영화해설 ‘샤이닝’ 현장스케치 이미지



- 완벽주의자 감독, 숨은 에피소드

 

지독한 완벽주의로 배우 및 스태프와의 불화가 끊이질 않았던 큐브릭 감독이었지만 영화의 완성도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온종일 집필 작업에 몰두하던 잭이 책상에서 쉴 새 없이 타이핑하던 글은 “All work and no play makes Jack a dull boy”라는 한 줄의 끝없는 반복. 이를 보고 부인인 웬디는 잭이 미쳤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장면에서 큐브릭 감독은 카메라에 잡힐 리 없는 두껍게 쌓인 종이 소품을 전부 타이핑했음은 물론, 일부러 오탈자까지 삽입했을 만큼 완벽을 추구했습니다. 아들 대니 역을 캐스팅하기 위해 잭 니콜슨과 셜리 듀발의 중간쯤 되는 억양을 쓰는 도시들을 골라 수백 명을 오디션 했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죠.

 

- 공간의 공포와 새로운 영화 어법

 

‘샤이닝’은 호러영화가 공간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제대로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외딴 곳의 넓은 공간에서 느껴지는 저밀도의 공포와, 또 반대로 좁은 공간에서의 폐쇄 공포가 함께 묘사되죠. 대니가 자전거로 호텔 복도를 누비는 동선을 스테디 캠으로 뒤에서 쫓는 장면은 공간을 설명하는 촬영 기법으로 보이지만, 나중엔 앵글이 높아지며 혼령의 시선인듯한 시점 샷이 연출됩니다. 공간과 카메라 워크 자체가 훌륭한 어법이 되면서 리드미컬한 공포감을 주게 됩니다.



현대카드 컬처프로젝트 19 스탠리 큐브릭 전 이동진의 영화해설 ‘샤이닝’ 현장스케치 이미지



이동진 평론가의 재미난 해설이 끝남과 동시에 질문이 쏟아졌습니다. 인디언 학살과 미국의 영토 확장이라는 역사적 배경을 상징하는 설정과 백인과 흑인으로 양분되는 홀로코스트 적 측면부터 당시로써는 엄청난 예산으로 지은 완벽한 세트와 영화 곳곳에 숨어있는 여러 의도된 설정들까지… 다룰 이야기가 끝이 없어 보입니다. 해석할 거리가 이토록 많은 공포영화가 또 있을까요? 극장을 빠져 나올 때까지도 여전히 영화 속 ‘오버룩 호텔’에서는 빠져 나오지 못한듯한 관객들. 못다한 ‘샤이닝’ 이야기와 감상평을 이어가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