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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벡] 장르를 초월한 창의성으로 새로운 음악 트렌드를 만드는 천재 뮤지션, 벡(Beck)

2016.04.21


"나는 혁명가다."

벡의 걸작 앨범 [Odelay]의 음반 뒷면커버 아래 쓰여 있는 "Je suis un revolutionaire(나는 혁명가다)"라는 글귀는 조금 과장되어 보일지언정 벡이라는 아티스트를 비교적 간편하게 정리해주는 문장이다. 고전과 새로운 흐름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와중 스스로의 개성을 기발한 음악으로 승화시켜낸 아티스트 벡의 재능은 이미 수 차례에 걸쳐 입증되었다. 힙합과 록, 포크, 테크노, 펑크, 블루스 등을 모조리 뒤섞어낸 그는 무대 위에서 마치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처럼 다리를 찢고 로봇 춤을 추다가 갑자기 어쿠스틱 기타를 매고 밥 딜런(Bob Dylan) 같은 포크 곡들을 부른다. 



 

현대카드 컬처프로젝트 23 Beck 벡 이미지



예술가의 피를 타고나다.


1970년 7월 8일 LA에서 태어난 벡은 아티스트 가문에서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는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과 아델(Adele),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를 비롯한 수많은 거장들부터 국내 가수 이승환의 '천일 동안'까지 전방위로 작업해온 저명한 편곡가이자 프로듀서, 지휘자인 데이비드 캠벨(David Campbell)이다. 앤디 워홀(Andy Warhol)의 팩토리 멤버였던 비비 한센(Bibbe Hansen)은 벡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벡이 해왔던 꼴라주 작업은 사실 플럭서스 무브먼트의 일원이었던 그의 외할아버지 알 한센(Al Hansen)에게서 영향 받은 것이었다. 이런 어마어마한 환경 속에서 성장해온 벡은 알차게 가족들의 영향을 흡수해갔는데, 열 살 무렵 부모가 이혼하고 어머니 곁에 머물기로 하면서 어머니의 성 '한센'을 따르게 된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중퇴한 이후 본격적으로 음악에 투신한다. 



현대카드 컬처프로젝트 23 Beck 공연 벡 이미지

 


시대를 대표하는, 게으른 패배자들의 찬가, 'Loser'


기타 한 대와 단돈 8불을 손에 쥐고 뉴욕으로 떠난 벡은 거의 부랑자처럼 생활하다가 다시 LA로 돌아온다. 비디오 가게에서 일하던 와중 벡은 패배주의가 난무하던 90년대 한가운데에 방점을 찍은 싱글 'Loser'를 내놓으면서 화려하게 급부상했다. 랩+포크+블루스가 융합된 형태의 곡에 삽입된 "나는 패배자야, 그러니 나를 죽이는 게 어때?"라는 내용의 장난스런 후렴구는 수많은 이들을 사로잡는다. 특유의 자조와 적대적인 내용으로 국내에서도 인기를 끌었지만 정작 한국에는 이 노래가 수록된 메이저 데뷔작 [Mellow Gold]가 비교적 뒤늦게 라이센스 발매됐다. 나른한 권태감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컨트리 블루스 기타 리프, 그리고 기이하게 엮여있는 힙합 비트는 90년대 중반 새로운 흐름을 예고케 했다. 커트 코베인(Kurt Cobain)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벡은 이 한 곡을 통해 '얼터너티브의 얼터너티브'가 된다.



출처: Youtube 



시대를 초월한 기발한 편집 감각의 정점 [Odelay]


'Loser'의 과열된 인기 이후 벡의 재능을 인정함에도 반신반의했던 이들에게 다음 정규 앨범 [Odelay]는 그야말로 회심의 카운터 펀치였다. 여유롭게 수많은 장르를 짜깁기해낸 이 레코드를 통해 그는 90년대에 가장 중요한 지점을 만들어낸다. 이만큼 여러 장르에 손을 대고 있음에도 종합적으로 잘 정리된 앨범도 드물었다. 'Where It's At' 같은 수록곡은 확실히 코믹했지만 앨범에서 펼쳐지는 수많은 샘플링 요소들은 단순한 인용이나 유머 수준에 머물지 않고, 그의 뇌 속에서 구성된 작품을 구현하는데 필요한 필수조건이 되었다. 



출처: Youtube



과거 류이치 사카모토(坂本龍一)가 YMO를 결성했을 당시 "미래는 컴퓨터의 보급에 의해 영감만 있으면 누구나 음악을 만들 수 있는 시대가 온다." 말했던 바 있다. 90년대 벡의 등장을 통해 사카모토가 언급한 바로 그 시기가 도래했다 생각해볼 수도 있었다. 이후 이런 벡의 작업방식은 수많은 추종자를 낳았고 [Odelay]를 발판으로 오늘날 벡은 모두가 인정하는 빅 네임이 됐다. 그러니까 오타쿠도 록스타가 될 수 있는 시대는 바로 이때부터였다.



영리한 천재, 진지한 송라이터로 거듭나다.


벡의 앨범 커버에는 일종의 법칙이 있다. 벡의 사진이 커버에 없는 앨범은 키취적인 샘플링 위주의 레코드이고, 벡의 사진이 커버에 있는 앨범은 차분한 발라드와 포크 위주의 앨범이라는 공식이다. [Mutations]에서부터 시작된 이 법칙은 비로소 [Sea Change]를 통해 완성된다. 이 차분한 앨범이 발매됐을 무렵 실제로 벡은 9년간 교제해온 리 리몬(Leigh Limon)과 헤어지고 심연의 바닥에 가라앉은 상태에 놓여있었다. 결국 스스로를 구출하기 위해 그는 이 앨범을 완성해나갔다. 앨범 표지의 그는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 


 

현대카드 컬처프로젝트 23 Beck 벡 이미지

출처: stereogum



일단 멈춰선 벡은 슬픔으로 흘러 넘치는 아름다운 멜로디, 그리고 아버지 데이빗 캠벨의 도움으로 완성된 장엄한 오케스트라를 삽입해낸다. 전체적으로 느리고 자조적인 가사로 이뤄진 이 앨범을 감상할 때마다 벡의 마음속 깊은 곳의 어둠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얼마 전 국내에서 재개봉한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 삽입된 벡이 부른 주제곡 'Everybody's Gotta Learn Sometime' 역시 이 앨범 직후 공개된 곡으로 마찬가지로 고독한 기운이 엿보였다.



출처: Youtube



그래미 올해의 앨범을 수상한 최근작 [Morning Phase]


벡의 2014년도 앨범 [Morning Phase] 또한 벡의 얼굴이 음반커버에 걸려있었고, 마찬가지로 침착한 앨범이 됐다. 척수손상치료에 전념하고 있었기 때문에 6년이라는 긴 공백 이후 나온 앨범이었고, 감미로운 싸이키델릭 포크/발라드를 중심으로 이를 완성시켜냈다. 결국 벡은 이 앨범을 통해 제57회 그래미 시상식에서 가장 중요한 부문인 '올해의 앨범' 상을 수상한다. 그 동안 주로 기발한 면면이 표면적으로 다뤄져 왔으나, 영역의 확장을 이뤄낸 본작으로 원숙미와 깊이를 지닌 작가임이 입증됐다. 당시 뉴요커(Newyorker) 지에 실린 리뷰는 앨범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음반을 50번 이상 들었지만 아직 단 하나의 결함도 발견하지 못했다." 



출처: Youtube



벡은 매번 좋은 의미에서 기대를 배반하는 앨범들을 내놓았다. 어지러울 정도로 다양한 스타일들을 섞어내며 시대의 최첨단을 질주하는 듯 보이다가도 현시대로부터 한발자국 물러난 채 진중한 매력을 발산하기도 했다. 그는 여전히 현 음악계에서 가장 빛나는 존재 중 한 명으로서 자신의 재능을 확대해가고 있다. 90년대의 시대정신을 내세운 'Loser'로 성공의 길에 들어섰지만 이후 그는 놀라운 상상력을 구사해내면서 대담하게 미지의 음악을 순차적으로 만들어나갔다. 그리고 이 작업물들은 현대 팝 씬을 활성화 시키는 어떤 자극제와도 같은 역할을 했다. 놀랍게도 이 젊은 거장은 아직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 더 많이 남아있는 것 같다.





Writer. 한상철

음악 애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