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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라이브러리] 거장들의 교감을 교감하다 - 현장 스케치

2015.04.02

서울 가회동에는 한 번 들어서면 빠져 나올 수 없는 마법 같은 공간이 있다. 바로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 세계 각국에서 공수된 귀한 디자인 서적이 빼곡하게 채워진 이곳은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꿨을 사랑스러운 공간이다. 최근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를 더욱 빛나게 하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과거와 현대 사진가의 특별한 교감에 의해 완성된 작품을 만날 수 있는 <Aperture Remix : Conversation between Photography Masters>전이 그것이다.
Aperture, 9인의 사진가에게 질문을 던지다 <Aperture Remix : Conversation between Photography Masters>는 단순한 사진전이 아니다. 한 작가의 지난 시간을 돌아볼 수 있는 회고전 혹은 하나의 주제 아래 여러 작가의 작품을 함께 전시하는 그룹전과는 사뭇 다른 기획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이 특별한 전시의 탄생 배경에는 사진 전문 출판사 Aperture가 있다. 1952년 설립해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사진이라는 매체에 집중한 수준 높은 출판물을 만들어 온 Aperture는 2012년 창립 60주년을 맞아 사진가 9명을 엄선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Aperture에서 출판한 작품집 중 자신에게 영감을 준 작가의 사진집을 모티브 삼은 오마주 작업을 완성하길 부탁했다. 9명의 사진가들은 Edward Weston, Paul Strand와 같은 사진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거장부터 Nan Goldin, Sally Mann 등 동시대를 공유하는 현존 사진작가, Aperture에서 발행한 평론집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장르를 넘어선 다양한 주제를 선정했다.
과거와 현대 사진 거장들의 긴밀한 교감 Philip Perkis는 <사진 강의 노트>에서 ‘사진가가 열린 마음과 지성으로 사물을 충분히 관찰한 다음 그 주제를 온전한 매체로 기록할 때,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무언가가 튀어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누구나 사진을 찍는 시대에 사진작가의 눈과 마음을 거쳐 탄생한 작품은 우리에게 사뭇 다른 감동을 선사한다. <Aperture Remix : Conversation between Photography Masters>전에서 마주하는 작품도 마찬가지다.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하얀 벽면에 걸린 여러 장의 사진 작품과 그 아래 단정하게 놓인 사진집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시선을 옮기니 Alec Soth의 영상 작품을 시작으로 Viviane Sassen 특유의 감성이 전달되는 흑백 사진, Doug Rickard가 재해석한 미국 풍경, Martin Parr가 포착한 소담한 일상, Vik Muniz의 포토 콜라주가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관람자에게 말을 건넨다. 서로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9명의 사진가의 개성이 그대로 묻어나는 작품 속에는 각각 어떤 스토리가 숨어 있는 걸까?
한 발자국 다가가면 보이는 것들 짙은 네이비와 선명한 핑크빛 하드커버가 시선을 사로잡는 Alec Soth의 <Summer Nights at the Dollar Tree>는 작가의 초심이 담긴 작업이다. 매그넘을 대표하는 사진작가 중 한명인 Alec Soth는 스무살에 Robert Adams의 사진집 <Summer Nights>에 매료되어 카메라를 들고 밤거리로 나섰던 소중한 기억을 소환했다. Aperture Remix 프로젝트를 위해 다시 어둠이 내린 거리로 나선 그는 당시 느꼈던 열정을 찾을 수 없었다. 불행 중 다행히도 그는 한 번도 시도한 적 없는 영상 작업을 통해 새로운 설렘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한편의 시처럼 유유히 흘러가는 영상이 바로 그 결과물 이다.

아름다운 영상 작품 아래에는 Robert Adams의 오리 지널 사진집과 Alec Soth가 새롭게 제작한 작품집이 나란히 놓여있다. <Summer Nights at the Dollar Tree>를 넘기다 보면 세대를 초월한 두 사진작가의 특별한 교감을 직접 목격하는 행운도 얻을 수 있다.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Alec Soth를 격려하기 위 해 Robert Adams가 직접 보낸 친필 편지가 사진집 에 담겨있는 것. 전시된 사진집을 한 장 한 장 천천히 감상해야 하는 이유다.

Alec Soth의 작업 바로 옆에 자리한 흑백 사진을 완성 한 주인공은 Viviane Sassen이다. 패션과 순수 사진의 경계를 넘나들며 활동하는 네덜란드 사진가인 그는 Edward Weston의 사진집 <Nudes>를 재해석했다. 사진계의 피카소라고 불릴 만큼 대상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독특하게 기록한 Edward Weston의 누드 사진에 Viviane Sassen 특유의 감성이 더해진 인물 사진을 겹쳐 편집해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Martin Parr는 한 작가의 사진집이 아닌 Aperture 매거진 103호 ‘Fiction and Metaphor’에 소개된 사진가 세 명을 선택했다. 그는 서로 다른 스타일로 작업하는 Chris Killip, Larry Sultan, Nan Goldin의 작업에 대한 경의를 각각의 작품이 소개된 페이지 위에 직접 남겼다. 조심스럽게 덧붙여진 종이 위에 손수 써 내려간 Martin Parr의 진심이 책장을 넘기는 순간 그대로 전 달된다.
예술로서의 사진, 사진의 재구성

자신에게 영감을 준 사진가의 작품을 재구성한 작가들의 작업도 눈에 띈다. James Welling은 평소 흠모하는 Paul Strand의 사진집 <Time in New England>를 선택해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1980년대 판본과 1950년대 판본을 비교한 뒤, 소실된 25장을 복원해 전시장 벽에 걸었다. Doug Rickard는 1970년대 미국의 일상 풍경을 담은 Stephen Shore의 <Uncommon Places>에서 영감을 받아 사진집 속에 등장한 사진과 유사한 풍경을 간직한 엽서를 이베이에서 수집해 새로운 사진집에 담았다. 덕분에 Doug Rickard가 완성한 <Ordinary Pictures>에는 거장 Stephen Shore의 작품과 작자 미상의 엽서 사진이 자연스럽게 함께 숨 쉬는 묘한 충돌이 일어난다. Penelope Umbrico는 Aperture가 거장들의 작품 세계를 탐구하기 위해 발간한 <Masters of Photography>시리즈를 선택한 뒤, Henri Cartier-Bresson, Alfred Stieglitz, Eikoh Hosoe 등 총 7명의 사진작가가 촬영한 산 사진을 스마트폰 카메라로 재촬영했다. 그 후, 거장들의 풍경 사진은 Penelope Umbrico에 의해 자유롭게 변형되어 전혀 다른 이미지로 구현된다. 벽에 걸린 총 16장의 사진은 그가 창조한 87개의 이미지 중 일부에 불과하다.

놓쳐서는 안 되는 장면들

어린 자녀들의 모습을 흑백 사진에 담은 Sally Mann의 <Immediate Family>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의 조카의 아이들의 일상을 몽환적으로 포착한 Rinko Kawauchi, Edward Weston의 사진집 일부를 찢어 Weston의 뮤즈인 Tina Modotti를 포토 콜라주로 환생시킨 Vik Muniz, Aperture에서 발행한 평론집을 모아 카메라를 만들고, 그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을 함께 전시한 스위스 듀오 사진가 Taiyo Onorato & Nico Krebs에 이르기까지 <Aperture Remix : Conversation between Photography Masters>에서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은 하나같이 신선하다. 시대를 초월한 사진작가들의 교감을 직접 공유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사진이라는 현대적 매체가 아날로그 감성을 간직한 사진집이라는 공간에 채집되고, 그것을 매개체로 작업한 놀라운 결과물이 우리 가까이에 있다. 하루에도 수십 번 무심코 사진을 찍는 시대에 사진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금번 전시는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에서 6월 21일까지 이어진다.



 

Writer. 김민정

월간사진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