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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카드 2010 이전] 기억나는 광고, 좋은 광고

2010.09.21


관련 광고영상, TV, 2007년 2월 on-air



학창시절, 광고 관련 수업시간에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눈을 감아 보세요. 숲 속에서 아침 이슬이 방울져 풀잎에 떨어지는 모습이 슬로비디오로 재생됩니다. 똑, 똑, 똑. 이런 내용의 피아노 광고가 있었죠. 눈을 뜨고, 기억 나는 사람 손을 들어 보세요." 강의실을 가득 메운 학생 전원이 손을 들었다.


"자, 이 광고가 어느 회사 광고였는지 기억나는 사람?" 한 학생이 자신있게 "Y 피아노"라고 대답했다. 대부분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지었다. "아마 대개 그렇게 기억할 겁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이 광고는 D 피아노 광고입니다."


그 충격은 지금도 확고한 믿음으로 남았다. 광고주에게 있어 최악의 광고는 표현이 서툰 광고가 아니다. 광고 내용은 생각나되, 어느 제품의 광고인지 기억나지 않게 하는 광고만큼 나쁜 광고는 없다.


대한민국에서 현대라는 브랜드를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사람들이 현대카드라는 이름의 신용카드를 알게 된 건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현대카드가 알파벳 시리즈 광고를 하던 2003년 무렵에서야 "아, 현대가 카드도 하는구나"라는 이야기를 나눴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실 이 알파벳 시리즈는 당시만 해도 고육지책이라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 있었다. 잠시 부언하면 알파벳 광고란, 카드의 특징을 영문 이니셜로 표현한 현대 카드의 특징을 강조한(이를테면 여행용은 T, 병원/약국용은 H, 주유소 할인은 O 등) 광고였다.




<현대카드 알파벳시리즈>

 


당시 배경을 생각하면, 뭐니 뭐니해도 이 시기 카드 광고를 지배한 모델은 덮인 마을을 배경으로 "여러분, 부~자 되세요"라고 외치는 김정은이었다. 친화력 최강의 모델과 빨간색 BC카드 로고, 그리고 누구도 싫어할 리 없는 메시지는 아예 수백년을 이어 온 전통의 새해 인사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를 "부자 되세요"로 바꿔 놓을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했다. 그런 분위기에선 어지간한 빅 모델로 차별화가 될 리 없었고, 후발 주자인 현대카드가 차라리 '특이한 광고'로 승부를 건다 해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광고 특이하게 하는 카드회사'는 계속 그 전통을 이어갔다. 지금껏 기억에 생생하는 2005년의 '선수' 시리즈가 그 포문을 열었다.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로 시작되는 바로 그 광고 말이다. 노래 가사에는 전혀 현대카드라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지만, 수많은 패러디를 낳으며 장수한 이 광고는 현대카드라는 회사의 이미지를 확실히 각인시켰다.




<일정한 톤앤매너를 유지해온 현대카드광고>



광고의 틀과 배경, 등장인물과 기법은 전혀 달랐지만 그 톤은 그대로 유지됐다. '앞면 앞면 뒷면 뒷면 옆면'으로 가는 광고는 대체 이게 뭔가 싶기도 했지만 메시지는 확실히 와 닿았다. '정말이지 놀라운 이야기' 시리즈는 살짝 낯간지러운 부분도 있었지만, 레고 빌딩이 올라가며 아빠와 아들의 대화로 진행되는 "카드회사라며? 아빠 카드 회사 다니는 거 맞아?" 광고에는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거리 디자인을 바꾸고, 열심히 콘서트를 주최하고, 세계적인 스타플레이어들의 경기를 유치하고, 광화문 한복판에서 스노보드 점프를 보여주는 카드 회사는 한 회사밖에 없었으니까. 


그와 동시에 현대 카드는 빅 모델 없는 광고의 전통을 줄기차게 이어갔다. 물론 현대카드 광고에 스타들이 나오지 않은 건 아니다. '살인의 추억'에서 '쌍화점'과 '고고70'에 이르기까지 그 시점에서 가장 화제가 됐던 한국 영화 속 장면들이 카드 광고로 변신해 전파를 탔고, 슈퍼콘서트 광고에도 스티비 원더에서 어셔, 안드레아 보첼리에서 빌리 조엘까지 역시 세계 정상급의 아티스트들이 등장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현대카드로부터 전속 모델료를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주 단순하게 생각하면 김연아나 장동건의 모델료를 휘트니 휴스턴의 내한 공연 개런티로 주고, 매표를 독려하는 공연 광고를 빙자해(?) 현대카드 기업 광고의 모델로 기용한 셈이다. 탁월한 발상의 전환이 아닐 수 없다. 



<발상의 전환으로 슈퍼스타들을 광고모델로 세우다>



지금도 카드 광고에는 쉴새없이 톱스타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렇게 천편일률적인 빅 모델 전략이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김정은 이후 BC 카드의 모델이 누구였는지 쉽게 기억하지 못한다(송혜교, 이다해, 김태희가 모델로 나섰다). 김현중과 황정음이 전한'Why not'이란 메시지는 선명하지만 그 광고가 어느 카드 광고인지 곧바로 대답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다. 또 송강호가 '내 카드는 세상 처음으로'라고 노래하는 광고는 똑같은 톱스타들이 등장하는 다른 카드 광고와 과연 얼마나 차별화되고 있을까.


맨 처음으로 돌아간다. 광고 내용만 기억나고 브랜드가 기억나지 않는 광고야말로 최악의 광고다. 수십편의 광고에 겹치기 출연하는 톱스타를 굳이 비싼 돈 주고 써서 그 지경이라면 더욱 문제다. 그런 의미에서, '뭔가 감각있어 보이는', 그리고 '뭔가 다른' 현대카드 광고의 미덕은 감히 독보적이라고 말해도 좋을 듯 하다.





Writer. 송원섭

중앙일보 JES 선임기자

스포츠조선과 일간스포츠에서 17년간 대중문화 현장을 취재했고 일간스포츠 엔터테인먼트 팀장과 콘텐트본부장을 거쳐 현재 중앙일보 방송본부에서 콘텐트기획을 담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