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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vodka] it vodka 프로젝트 #1 술의 말, 말의 술

2015.12.21


코 끝에 닿는 겨울이 점점 깊어지고, 한 해의 마지막이 다가오면서 달력에는 크고 작은 송년회가 표시됩니다. 쨍한 추위를 가까운 사람들과 보낼 수 있다는 것은 참 다행입니다. “아무튼 올해도 수고했어.”, “올해도 고마웠어.”, “내년에도 잘 부탁해.”로 부딪히는 술잔들이 있다는 것은 다행입니다. 해를 보내는 계절이, 체온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겨울인 것도 역시 다행입니다. 겨울이 아무리 찬바람을 생성해도, 우리 술자리가 훈기로 가득한 것은 술기운 때문만은 아니겠죠.
의사소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하지 않는 것을 듣는 것이다. 피터 드러커
우리가 술자리를 갖거나 술을 마시는 것은 단순히 술의 ‘생화학적 효과’ 때문은 아닙니다. 미국의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의 말에서 힌트를 얻자면 ‘술자리’라는 것도 결국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하나의 환경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의 ‘술’은 ‘말하지 않는 것’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요. 다시 말해, 내가 너에게 혹은 내가 나에게 건네는 한 잔의 술은 소리 내거나, 받아 적을 수는 없는 말은 아닐까요.

 

술은 무엇이길래 아빠들로 하여금 굳이 자고 있는 아이를 깨워 아무 말없이 초록의 지폐를 쥐여주게 했던 걸까요? 술은 어떻게 오늘 처음 만난 신입생들이 어깨동무를 하게 만드는 걸까요? 술이라는 것이 무엇이길래 단정한 드라마 속 여자 주인공들의 얼굴을 붉게 만들고는 다음 날 이불킥을 하게 만드는 걸까요?

 

네. 술은 어떤 방식으로든 너와 나의 연결고리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너와 나, 나와 스트레스로 가득한 하루, 우리가 맞이하는 축하나 위로 또는 첫 만남의 공기들. 술은 그 사이를 메우며 찰랑 된다고 말입니다.
왼쪽 : 홍상수 감독의  생활의 발견, 오른쪽 : 홍상수 감독의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에서 남녀는 술자리에서 서로의 꺼먼 속마음을 나눕니다. 소설가 레이먼드 카버는 유독 술이라는 장치를 자주 이용하는데, 작품 속 술은 예기치 못한 방문으로 인하여 서로가 어색하거나 껄끄러운 사이에서, 혹은 중요한 이야길 나누거나 묵직한 결정의 순간 등에 위치하여 서사를 진행시키고 균형을 잡아줍니다.(영화 ‘버드맨’에서 리건이 무대에 올리는 연극이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이었죠. 그리고 역시 술을 마시며 대화는 이루어집니다.)

 

아빠는 “가장으로 산다는 것은 말이야.”라는 말 대신에 소주 한 잔을 비우시고, 스무 살의 우리는 “누구냐 넌”이라는 말 대신에 서로에게 소맥을 말아주죠. 또 어떤 이는 “널 꼬셔 불라니까”라는 말 대신에 와인잔을 빙그르르 돌립니다 그리고 우리 중 누군가는 홀로 텔레비전을 보면서 “아무튼 하루(혹은 한 주)가 별일 없이 끝나서 다행이군”이라는 말 대신에 맥주 한 캔을 톡 따서 마시죠. 이렇게 술은 우리가 속한 무수한 관계 사이에서, 생활의 틈바구니에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생각하기에 따라 술의 힘을 빌린다는 것은 분명히 어느 정도 비겁하다고 느껴집니다. 네. 그러니까 ‘취중진담’이라는 말도 역시 조금 거북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술 마시고 하는 말 같은 건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어. 싫다니까 정말.’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사람과 눈빛을 나누며 만나는 순간보다 톡이나 SNS로 훑게 되는 순간이 더 많아지면서는 그것이 술자리라도 사람과의 온기를 나누는 것은 행복한 일이라는 생각입니다. 게다가 톡이나 SNS에서는 문자로만 소통이 이뤄지는데, 그 과정에서 글자로만 전하기엔 부족한 것 같아 문장의 끝에 붙이게 되는 ^.^(선한 웃음)의 이모티콘이나 “오랜만이야.”라는 말 뒤에 붙이는 술 한 잔은 본질적으로는 같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모든 것이 결국 마음을 전하려는, 가진 감정을 기어이 표현해내려는 노력이 라는 점에서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꼭 술이나 술자리가 단순하게 관계적 도구인 것 같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소주, 맥주, 막걸리나 와인, 위스키, 보드카 그리고 칵테일이 각각 성격이 다른 친구라고 생각합니다. 술은 처음 만나는 혹은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만 있는 자리의 어색함을 깨고자 투입된 그 모임의 호스트 같은 친구입니다. 맥주가 우리의 기운을 북돋아주는 친구라면 소주는 힘든 이야길 묵묵하게 들어주는 친구, 막걸리는 흥이 많은 친구 같습니다. 와인은 은근하게 안아주는 친구, 위스키는 말이 없지만 존재감이 묵직한 친구, 보드카는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의 주도를 책임지는 친구 같습니다.(우리는 친구가 많네요.)
전계수 감독의 영화 러브픽션 - 사람을 판단할 때 겉모습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어떤 옷을 좋아하는지,어떤 색을 선호하는지, 운동화를 좋아하는지 구두를 좋아하는지,뿔테 안경을 좋아하는지 무테 안경을 좋아하는지, 걸을 때 등을 꼿꼿이 세우고 걷는지팔자걸음으로 걷는지가 그 사람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려주지 않나요?전계수 감독의 영화 러브픽션 중 주월(하정우 분)의 대사
우리가 사람이나 사물의 성격을 비슷한 문장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주월의 말처럼 각자 가진 고유의 본질과 함께 표현되는 겉모습에도 이유가 있다고 보입니다. 술의 경우에선, 소주는 초록의 유리에서 청량함을 알 수 있고, 맥주는 캔이든 병이든 상관없이 담길 수 있다는 점에서 호쾌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와인의 코르크 마개나 라벨에서 우리는 따뜻한 우아함을 느끼고, 위스키는 묵직하고 섬세한 유리병으로 무게감 있는 고독을 짐작하게 합니다. 보드카의 투명한 병은 가진 것을 온전히 보이는 무색무취의 순수함 같은 것을 엿볼 수 있죠. 이렇게 술들의 성격은 가지고 있는 맛뿐 아니라 내용을 기반으로 고안된 외형(디자인)까지 함께 더해져서 만들어집니다.

 

소주 병이 붉은 유리였다면, 맥주가 크리스털에 담겼다면, 막걸리가 로코코 시대의 라인이 돋보이는 라벨을 달았다면 분명 우리가 느끼는 맛은 평소와 다르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우리 각자는 어떤 술과 닮아 있을까요? 혹은 어떤 성격의 친구가 우리의 송년회를 더욱 즐겁게 해 줄 수 있을까요? 아무튼 술 마시기 좋은 계절입니다. 이 맘 때는 덥힌 사케에 새우튀김으로 한 해의 수고를 위로해도 좋겠습니다.

 

이어질 글들은 좀 더 종잡기 어려운 언어의 세계입니다. 그 세계에서는 지하철에서 과일소주를 나발로 부는 여자가 있습니다. 또 편의점에서 집까지 오는 길에 와인 한 병을 깔끔하게 마시는 사람도 있습니다. 스테이크에 막걸리를 곁들이는 데이트가 있고 홀로 보드카를 싱글 오리진으로 마시고 다음날이 되는 일도 있습니다.

 

할 수 있다면 글 밖으로 쑤욱 나가서 술 한 잔 건네고 싶은 마음입니다.

 

“올해도 수고하셨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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