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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뮤직] 크라프트베르크, 펫 샵 보이즈에서 처치스까지, 여전히 반짝이는 신스 팝

2013.11.05


많은 사람들에게 영미권의 1980년대 문화는 ‘으리으리하게 번쩍거리는 인공미’로 기억될 것이다. 그래서인지 당시의 영화, 패션, 음악에서 종종 느껴지곤 하는 것은 모종의 ‘번지르르 함’인데, 이를테면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 나오는 미래 도시의 이미지가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80년대의 사람들에게 ‘미래’란 그런 것이었던 셈이다. 오늘날의 ‘미래’가 마치 아이폰 디자인처럼 만들어지듯.

 

 

Pet Shop Boys

 

 

대중음악의 영역에서 그 번지르르 함과 인공미는 신스 팝이라는 형식을 통해 나타났다. 신스 팝은 말 그대로 신시사이저를 사용하여 만든 팝 음악이다. 키보드, 기타, 드럼, 베이스 등의 소리를 전자적으로 합성하여 만들어낸, 인공적이면서도 차가운 소리를 특징으로 하는 이 음악은 1980년대 영국을 중심으로 큰 히트를 기록했다. 펫 샵 보이즈(Pet Shop Boys), 디페쉬 모드(Depeche Mode) 등이 차트를 휩쓸었고 스팬다우 발레(Spandau Ballet) 같은 밴드들이 소녀들의 우상으로 등극했다.

 

 

 

 

오늘날 신스 팝은 1980년대의 대표적인 상업적 팝 음악으로 간주되지만, 초기 신스 팝의 형성 과정에서는 크라프트베르크나 브라이언 이노, 캬바레 볼테르 등의 ‘아방가르드’한 뮤지션들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신스 팝은 1980년대 후반부터 인기를 잃었으며, 1990년대에는 몇몇 거물들을 예외로 둔다면 자취를 감추다시피 했다. 그러나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젊은 뮤지션들이 1980년대의 ‘그 소리’에 새삼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새로운 시대의 신스 팝 밴드들은 그 시절의 으리 번쩍한 소리의 느낌을 재현하고자 노력하는 동시에 그간 전자음악에서 일어난 기술적인 진보들을 적절히 가미하면서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내고 있다. 최근 몇 년 간 등장했던, 그리고 막 기지개를 켠 밴드들 중 주목할 만한 다섯 팀을 간략히 소개하려 한다.

 

 

Chvrches

 

‘처치스’라고 발음하는 이 밴드는 리드 보컬을 담당하는 로렌 메이버리(Lauren Mayberry)를 비롯하여 이언 쿡(Iain Cook)과 마틴 도허티(Martin Doherty)로 구성된 글래스고 출신의 3인조 신스 팝 밴드다. 결성 후 발표한 싱글인 "The Mother We Share"와 "Lies" 등이 인터넷에서 화제를 모았고, BBC의 ‘Sound Of 2013’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리고 많은 기대 속에 녹음된 이들의 데뷔작은 발표 즉시 각종 매체와 음악팬들 사이에서 우호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라면 너무 차분한 설명이고, 거의 올해의 음반 대접을 하는 곳들도 있다).

 

 

 

 

디페쉬 모드와 M83 등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는 것처럼 들리는 처치스의 음악은 기본적으로 ‘그때 그 시절’ 신스 팝의 소리들을 비교적 충실히 재현하고 있지만, 거기에 ‘댄서블’한 비트와 청량한 인디 팝 멜로디를 감각적으로 결합함으로써 자신들의 개성을 확보하고 있다. 무엇보다 거의 이 바닥의 새로운 ‘아이돌’이라고 할 만한 보컬 로렌 메이버리의 목소리가 자칫 싸늘할 수도 있는 무드에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온기를 불어넣는다. 데뷔작의 마법이 지나치게 강해서 다음 행보가 걱정될 정도라고 하면 호들갑일까. 앞으로의 성장이 기대되는 밴드다.

 

 

St. Lucia

세인트 루시아는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는 뮤지션 장 필립 그로블러(Jean-Philip Grobler)의 원맨 프로젝트다. 요하네스버그에서 태어난 그로블러는 TV와 영화에 사용되는 음악들의 라이선스를 담당하는 일을 하는 틈틈이 자기 음악을 만들었고, 2012년 컬럼비아 레코드 산하의 인디 레이블 네오 골드 레코즈와 계약을 맺어 데뷔 EP를 발표했다. 이후 한 장의 EP를 더 발표한 후 2013년에 정규 데뷔작 "When The Night"을 공개했다.

 

 

 


환하게 밝아오는 조명처럼 퍼지는 앰비언트 사운드를 배경으로 귀에 쏙 들어오는 훅과 함께 신시사이저의 ‘펀치’가 정면에서 터지는 음반의 인트로 넘버 'The Night Comes Again'을 지나 인상적인 킬링 싱글 'The Way You Remember Me'까지 지나면 세인트 루시아의 음악을 듣는 시간이 무척이나 즐거울 것이라는 감이 또렷이 온다. 사운드는 화사하고 멜로디는 짜릿하다. 1980년대 신스 팝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순간마다 반짝거린다. M83의 음악에 복고를 좀 끼얹으면 나올 노래들 같기도 하다. 여기에 ‘이국적’인 리듬과 분위기가 가미되면서 뱀파이어 위켄드(Vampire Weekend) 같은 ‘힙’한 밴드들과의 접점도 적절히 갖춘다. 이 뮤지션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Niki & The Dove

 

니키 앤 더 도브는 스웨덴 출신의 일렉트로닉 밴드로, 보컬을 담당한 말렌 달스트룀(Malin Dahlström)과 키보드를 만지는 구스타프 칼뢰프(Gustaf Karlöf), 드럼의 마그누스 뵈크비스트(Magnus Boqvist)로 이루어져 있다. 2010년부터 함께 작업을 시작했으며, 처치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BBC의 ‘Sound Of 2012’에 선정된 바 있다. 2012년 첫 정규 데뷔작인 "Instict"를 발표했는데, 이 음반은 서브 팝 레이블을 통해 미국에도 배급되었다.

 

 

 

 

달스트룀의 보컬이 수지 앤 더 밴시스의 수지 수를 연상시킨다는 말도 듣는 모양이지만, 니키 앤 더 도브의 개성은 목소리보다는 사운드와 멜로디에서 더 강하게 배어 나온다. 동향의 아방가르드 일렉트로닉 뮤지션인 나이프(The Knife)에게서는, 또한 겸사하여 비요크(Bjork)에게서는 기묘하게 뒤틀리는 사운드 프로덕션을, 역시 스웨덴 출신의 뮤지션인 로빈(Robyn)에게는 한 순간 사람을 확 끌어당기는 팝 튠을 배워온 것이 아닐까 싶은 음악을 들려주는데, 아마도 여기 소개된 이들 중에서는 1980년대의 소리를 가장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뮤지션일 것이다. 신스 팝이 ‘아방가르드’에서 자양분을 흡수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이 밴드가 도전적으로 만들어내는 일렉트로닉 팝 사운드를 ‘신스 팝’이라 부르지 못할 이유는 없다.

 

 

White Prism

 

화이트 프리즘은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여성 뮤지션 조애너 크래니치(Johanna Cranitch)의 솔로 프로젝트다. 어린 시절 성악 교육을 받은 바 있으며, 플리트우드 맥과 케이트 부시, 그리고 왬! 등의 음악에 영향을 받아 곡을 쓰는 걸 꿈꾸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뉴욕으로 이주하여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고, 조애너 앤 더 더스티 플로어(Johanna and the Dusty Floor)라는 이름의 프로젝트를 꾸린 바도 있다. 이 때의 음악은 현재의 음악과 많이 다른, ‘오페라틱’하고 ‘심포닉’한 요소가 섞인 팝이었다고 한다.

 

 

 

 

이후 현재의 관심사, 즉 본격 케이트 부시-플리트우드 맥 계열의 1980년대 풍 일렉트로닉 팝으로 음악 스타일을 바꾸면서 프로젝트 이름도 바꾸고 다섯 곡이 수록된 EP를 자신의 홈페이지(http://whiteprismmusic.com/)에 발표했다. 부드럽고 매끄러운, 드림 팝의 영향이 물씬 풍기는 소리들로, 이를테면 퓨리티 링(Purity Ring)보다는 더 팝적인 접근법을 취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크래니치의 풍부한 보컬이 여기에 몽환적인 느낌을 더한다. 여기 소개된 뮤지션 중에서는 가장 ‘파릇파릇한’ 신인일 텐데, 앞으로의 행보를 지켜볼 필요가 있겠다.

 

 

Hurts

 

허츠는 이미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밴드’의 범위를 훌쩍 넘어선 뮤지션이다. 보컬리스트 테오 허치크래프트(Theo Hutchcraft)와 키보드와 기타를 담당한 애덤 앤더슨(Adam Anderson)으로 이루어진 맨체스터 출신의 이 밴드는 2009년에 발표한 'Wonderful Life', 'Unspoken' 등의 인상적인 싱글로 파란을 불러일으켰으며, 2010년 발표한 데뷔작 “Happiness”와 올해 발표한 소포모어 음반 “Exile” 모두 시장과 매체에서 좋은 반응을 얻어냈다. 안산 밸리 록 페스티벌에서 이들의 진가를 확인한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른바 21세기의 ‘뉴 웨이브/신스 팝 리바이벌’에서 허츠가 돋보이는 점을 꼽으라면 그들이 만들어내는 음악뿐 아니라 그들의 ‘외면’도 같이 언급해야 한다. 허츠의 묵직하고 음울하며 엄청나게 에코가 걸린 음악에서 디페쉬 모드나 티어스 포 피어스(Tears For Fears) 등을 연상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들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패션과 비디오 등에서도 울트라복스(Ultravox)와 스펜다우 발레 등이 선보였던 ‘댄디’한 이미지를 지극히 ‘퇴폐적’인 방식으로 재현해낸다. 거의 완전한 복고의 노선을 따름으로써 역설적으로 인상적인 신선함을 획득해낸 밴드다.

 

 


 

Writer. 최민우

 

대중음악 평론가.
2002년부터 음악 관련 글을 쓰기 시작했다. 현재 여러 온․오프라인 매체에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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